131화
알릭스는 친구에게 빵을 가져다주겠다며 나갔고 남은 이들은 식탁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게 정말입니까?”
바이젤은 라비엘리가 동생을 찾았다는 말에 누구보다 기뻐하였다.
“세상에, 정말…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그는 마치 제 동생을 찾은 것처럼 감격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루오 씨가 여관에 오지 않았다면 저는 동생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바이젤이 놀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손을 더듬어 제 앞에 놓인 컵을 집어 들었다.
“정말요?”
“막 여관을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다시 후작님의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거든요. 그런데 사제님들이 여관에 오셨고 루시안이 쓰러졌죠.”
“…….”
“악마를 퇴치하러 오신 사제님 중에 한 분이, 제 동생을 아주 잘 알고 계셨어요.”
“오 맙소사.”
“루오 씨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겠죠. 동생을 찾는데 아주 오래 걸렸을 거예요.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요.”
“믿기 어렵군요…….”
바이젤은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묘하죠? 인연이라는 것도 재미있고요.”
“네, 정말 그렇네요.”
“그러니 이제 죄책감은 조금 내려놓으세요. 수단이 잘못되긴 했지만 어쨌든 저는 동생을 찾았고 당신도 알릭스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알릭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바이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옷소매로 무심하게 눈매를 슥슥 닦더니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자, 이제 제가 끓인 특제 차를 한 모금씩들 하시죠.”
루시안이 적당히 나서 분위기가 어두워지려는 걸 막았다.
투박한 컵에 마시는 차는 어딘가 색달랐다. 단단한 목재를 여러 번 깎아 만든 것 같았는데 은은하게 나무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알릭스가 당신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겠네.”
라비엘리는 나무 접시에 놓인 쿠키를 입안에 쏙 넣으며 대답했다.
“내가 요리를 잘해서 알릭스가 좋아하는 것 같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바이젤이 나섰다.
“후작님께서는 못하는 게 없으시죠. 정말 대단한 분이라니까요.”
그의 말에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맹세했어요. 저는 남은 생을 후작님을 위해 살 것입니다.”
바이젤은 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어느덧 잠긴 목소리를 냈다.
그는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누군가 제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는데 저를 찾아와 주고 알아봐 준다는 사실은 벅차도록 감동적인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저를 위해 살아요.”
루시안은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바이젤, 당신 아들 알릭스를 위해 사세요.”
“후작님…….”
“제게 더 이상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요. 대신 알릭스를 위해 모든 걸 바치세요.”
바이젤이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 내자 루시안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당신 영혼만 빼고요.”
그는 얼굴에 번진 과거의 기억과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그러더니 컵에 들어있던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우리 아들을 위해서 일하러 다녀오겠습니다.”
바이젤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어딜?”
루시안이 의아하게 묻자 바이젤을 문에 걸려 있던 모자를 챙겨 들더니 히죽 웃었다.
“잡부가 하는 일이야 뻔한 거죠. 그럼 다녀올 테니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쾅.
바이젤이 집 밖으로 나가자 작은 오두막에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라비엘리는 컵을 들더니 남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이미 식어버린 차를 마시고 쿠키를 하나 집어 들려는데 루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맛있네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하고 말았다. 그들을 감싼 공기와 루시안의 시선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뭐가?”
그가 웃음을 숨기며 묻자 라비엘리는 컵을 들어 보였다.
“점심은 어땠어요?”
“저렇게 요리를 잘했으면서 말도 안 하고.”
라비엘리가 부루퉁한 음성을 내자 루시안이 억울한 듯 손을 들었다.
“아니 내가 요리할 기회가 있었습니까?”
“당신 친구 말이 맞았네요. 촉망받는 인재에 못하는 게 없는 실력자.”
“…….”
“이제 부정도 안 하네요.”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보였다.
“그래요, 못하는 게 없는 후작님. 이제 다음 계획은 뭐죠? 여기서 계속 지낼 생각이신가요?”
“당분간은 그럴 생각입니다.”
“그다음에는?”
“내 미래에 관심이 많네.”
“너무 놀라기 싫거든요. 나도 감정적으로 미리 대비를 좀 하고 싶어서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노예 시장에 있다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내가 노예로 팔려간 줄 알았습니까?”
“아뇨, 노예상이 돼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줄 알았어요.”
루시안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놀랄 일이 아니지 않나?”
“왜 아니죠?”
“특별할 일도 아니잖아요. 사람도 쉽게 죽이는데 노예상이라고 못할까 봐?”
루시안이 능청스레 말하자 라비엘리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노예상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하고 있었다니 실망이에요.”
“그것 또한 미안하군요.”
“그러니 내가 더 놀라지 않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줘요.”
“방법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방법이라고요?”
“네, 일종의 연구랄까.”
그동안 루시안과 시간을 보내며 그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녀는 루시안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연구라니, 그가 무슨 연구를 한다는 말인가.
“니엘 페른을 만나봤죠?”
갑작스레 나온 이름에 라비엘리는 멈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시안은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지만 눈가에 남은 우울함은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알릭스를 찾으러 가기 전에 그 사람을 만났겠지.’
라비엘리는 니엘이 절규하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슬프고 안타까웠지만 라비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녀석이 일어나서 다시 두 다리로 걷는 모습을 봐야겠어요.”
그제야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말한 ‘연구’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라비엘리.”
“네.”
“니엘이 아니었다면 난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거예요.”
마른 낙엽이 부서지듯 위태로운 음성이었다.
“항구에는 역병이나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전부 제대로 먹지 못하고 병에 걸려 있었죠.”
안타까운 이야기에 라비엘리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몸이 딱딱해지고 입술이 파랗게 변하고… 너무 가혹하게 죽음을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니 깨끗한 물을 마시고… 아주 간단한 약으로 전부 나을 수 있는 병이었는데.”
라비엘리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린 여자아이들은 수녀들이 데려갔고,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소년들은 잘 차려입은 남자들이 데려갔어요. 그 신사들이 노예상이라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지만.”
“…….”
“나는 어느 쪽에도 들지 못했어요. 기침을 너무 많이 해서 무리에 제대로 낄 수도 없었습니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손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곳에서 페른 씨를 만난 건 기적이었습니다.”
라비엘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시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그를 숨기고 속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당신 친구가 내게 편지를 보냈어요.”
루시안은 느리게 고개를 돌려 라비엘리를 마주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신 몰래 페른가에 다녀왔어요.”
“이온에 간다고 날 속이고 녀석을 만나러 갔군요. 편지 두고 간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던데?”
“전부 당신에게 배웠죠.”
라비엘리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 내리자 루시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제발, 제발 그런 거 배우지 말아요.”
“이미 늦었어.”
그녀가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만일까.
루시안은 제 손등을 감싼 라비엘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의 평화가 너무 소중해 무엇으로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제게 라비엘리를 사랑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내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미안해요.”
“내게 못된 짓을 가르친 게 미안하다면 됐어요.”
“당신을 속여서 미안해요.”
“루시안.”
“당신이 좋아져서 미안해.”
“…….”
“그리고 점점 욕심이 나서 미안해.”
라비엘리의 가슴에 그의 뜨거운 음성이 닿았다. 손에 닿았던 온기는 어느덧 입술로 옮겨졌다.
루시안은 그녀를 끌어안았고 이내 나른하고도 황홀한 입맞춤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