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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30)화 (130/136)

130화

라비엘리는 어색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번에는 바이젤이 그녀를 만류했다.

“편히 계세요, 아가씨.”

“저도 돕고 싶어요. 야채라도 씻을게요.”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순 없어요.”

라비엘리가 다시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자 바이젤이 그의 아들에게 손짓했다.

“알릭스, 식탁을 좀 닦거라.”

“네.”

알릭스는 곧바로 일어서더니 행주를 집어 들었다. 소년은 야무진 동작으로 식탁을 닦았고 라비엘리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릭스, 내가 할게.”

“다했어요. 손님에게 일을 시키면 안 되거든요.”

그러는 사이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바이젤은 바닥에서 땔나무를 쌓았고 요리는 전부 루시안이 하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 난다.”

라비엘리가 알릭스에게 말하자 소년은 눈을 빛내며 뜻밖의 말을 했다.

“후작님 요리 엄청 잘하세요.”

“뭐? 정말?”

“네, 진짜 최고예요.”

라비엘리는 고개를 돌려 루시안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기대된다.”

“설마 한 번도 안 드셔보셨어요?”

라비엘리가 턱을 괴고 중얼거리자 알릭스는 꽤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사실 요리하는 모습도 처음 봐.”

“왜요?”

“응?”

“후작님 여자친구 아니었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라비엘리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행주 한 번, 식탁 한 번 쳐다보자 알릭스가 다시 물었다.

“아니에요?”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데 루시안이 냄비를 통째로 들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알릭스, 레이디를 곤란하게 해선 안 돼.”

“죄송합니다.”

알릭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라비엘리는 소년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냐, 괜찮아.”

그러고는 되레 루시안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왜 한 번도 해주지 않았어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흐릿하게 웃더니 냄비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야채와 고기를 넣고 푹 끓인 스튜는 감칠맛 나는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소년은 얼굴에 번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진짜 맛있어요. 후작님은 정말 못하는 게 없으시다니까요.”

“알릭스, 그런 거짓말 하면 못 써.”

“진짠데.”

루시안은 소년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리며 라비엘리에게 말했다.

“맛없을 거예요. 배 채우는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식탁 위에 음식이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먹음직스러운 스튜, 절인 생선, 알맞게 구워진 빵과 한입 크기로 자른 과일까지. 그야말로 따뜻하고 완벽한 차림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라비엘리는 스튜를 한 스푼 떠서는 그대로 입에 넣었다.

루시안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라비엘리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동안 입 안에 든 것을 오물오물 씹던 라비엘리가 꿀꺽 삼키더니 환하게 웃었다.

“너무 맛있어요.”

“거봐요, 진짜 맛있죠?”

알릭스가 루시안을 대신해 불쑥 대답했다. 그러더니 식탁에 놓인 빵 접시를 가리켰다.

“빵도 드셔보세요.”

“설마 이것도 저 신사분이 구운 건 아니지?”

“맞아요.”

“뭐? 정말이야?”

라비엘리가 놀란 눈으로 루시안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되레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빵도 구울 줄 알아요?”

“맞죠? 후작님은 못 하시는 게 없다니까요.”

라비엘리는 손을 뻗어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에 힘을 주어 반으로 가르자 결대로 반듯하게 찢어졌다. 한 조각 입에 넣자 보들보들하면서도 쫄깃한 것이 아주 맛이 좋았다.

“맛있죠?”

알릭스는 이번에도 신이 난 얼굴이었다.

“정말 맛있다. 루시안, 이제 당신이 말 좀 해봐요. 정말 전부 다 당신이 만들었어요?”

루시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별것도 아닌걸. 재료와 불만 있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고요.”

“이런 재주가 있었으면서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요?”

“안 그래도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알고 있는데 그 아래 한 줄 더 추가하기 싫었거든요.”

“이 정도면 인정할만한걸요.”

“다행이네.”

루시안이 라비엘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공연히 어색한 탓에 라비엘리는 다시 스푼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이따금 가벼운 대화와 웃음이 오가며 식사는 끝이 났다.

잠시 후, 알릭스와 루시안이 남은 땔나무를 밖으로 옮기는 사이 바이젤이 조심스레 라비엘리에게 다가왔다.

“저.”

바이젤은 문가를 한 번 내다보더니 머뭇거리다 목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그는 여전히 가죽만 남은 것처럼 비쩍 말랐으나, 전에 비해 혈색이 좋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

“아뇨, 제게 죄송할 일은.”

라비엘리가 어색하게 웃었지만 바이젤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웃고 떠들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세요.”

물론 바이젤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가 겪은 일은 충분히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악마와 거래를 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

“감옥에서 죽으려고 했는데 그조차 쉽지 않더군요.”

“…….”

사내의 얼굴에 일순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다 제게도 기회가 왔어요.”

“루오 씨.”

“그런데 그때 아가씨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바이젤은 잔뜩 젖은 눈으로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가족이 있다고 하셨죠? 생사도 모른 채 그저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안다고요.”

그가 말문을 열자 라비엘리는 얼핏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바이젤이 기억하는 것만큼 생생하지는 않았다.

‘만약 내게도 그런 유혹이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 쉽게 거부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을 원망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저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요.’

“비극은 공평하구나. 나처럼 미천한 자도, 아가씨처럼 고귀한 사람에게도 언제든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구나. 그건 인간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아가씨의 불행으로 위안을 얻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아가씨께서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경험을 나누어준 덕분에 어떻게든 살아서 우리 아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이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호흡 역시 조금 거칠어진 듯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고 아프게 한 죗값은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라비엘리는 한쪽 뺨을 매만지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지난 일인걸요. 루시안이 당신을 용서했으면 그걸로 됐어요.”

루시안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바이젤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안타깝지만 그분은 영원히 절 용서하지 않으신대요.”

“네?”

“평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거라고 하시던걸요.”

라비엘리는 퍽 루시안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후작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아가씨께서 절 수렁에서 건져내셨고, 후작님께서 절 살아 숨 쉬게 하셨습니다.”

“…….”

“그리고 제 아들도요.”

바이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알릭스는 괜찮은가요?”

“네, 험한 일을 겪은 것치고는 밝고 건강합니다.”

“다행이에요.”

제 불행을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덤덤해 보였는데, 알릭스에 관해 말하자 바이젤은 급격히 불안해 보였다.

“이제 이 집에서 좋은 일만 있으실 거예요.”

라비엘리가 부드럽게 말하자 바이젤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아직 모르셨군요.”

“?”

“내일이면 이 집은 마지막이에요.”

바이젤의 말에 라비엘리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곧 새집으로 이사를 가거든요.”

“정말 잘됐네요.”

“전부 후작님께서-”

그때 닫혔던 문이 열리고 알릭스와 루시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이젤과 라비엘리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루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

라비엘리는 얼굴에 잔뜩 힘을 주며 모른 체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한 사기꾼인지에 대해 얘기했습니까?”

“하여튼 눈치는 빨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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