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적당히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바닥에서는 풀냄새가, 위로는 아침 이슬의 신선한 냄새가 뒤섞이고 있었다.
질펀한 들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나무숲 덩어리는 지평선을 가득 채웠다. 멀리 가파른 경사의 언덕배기가 보인다.
아래로 내려가면 완전히 다른 경치가 펼쳐질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멀리 자그마한 아이가 공 하나를 이리저리 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비엘리는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이가 사라지기 전에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안녕.”
아이는 다행히 라비엘리가 다가올 때까지 인근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몸집이 작고 말랐지만 총명한 눈빛에 입매가 야무진 소년이었다.
“안녕하세요.”
소년은 조금 경계하는 빛을 보이더니 굴리던 공을 발등으로 세웠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 도와줄 수 있을까?”
라비엘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소년과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소년은 여차하면 공을 들고 달아나야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로튼에서 온 라비엘리 르휜이라고 해.”
“…….”
“꼭 찾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여기가 피카르디 맞니?”
라비엘리가 묻자 소년이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길을 잃은 줄 알았거든.”
라비엘리는 한숨을 쉬며 살갑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손에 든 종이에는 이름과 지명만이 적혀 있었다. 대도시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이름만 들고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아, 그래. 혹시 쿠키 좋아하니?”
라비엘리는 품 안에서 작지만 그럴듯하게 포장된 쿠키를 꺼내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라비엘리가 내민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함부로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 그래. 아버지 말씀이 옳아.”
라비엘리는 머쓱해진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그러면 여기서 얼마나 더 내려가야 마을이 나오는지만 알려줄 수 있을까?”
“한참 더 내려가야 해요.”
쿠키는 먹지 않았지만 소년은 처음보다 누그러진 얼굴로 라비엘리에게 대답해주었다.
“피카르디는 엄청나게 크지만, 이 아래로는 집이 몇 채 없어요. 여긴 아주 작은 마을이거든요.”
“그렇구나.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어.”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몸을 낮추고 소년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바이젤 루오 씨의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니?”
“왜요?”
소년의 표정이 갑자기 변하였다.
알고 있구나.
라비엘리는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말했다.
“그분을 꼭 좀 만나야 해.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우리 아버진데요.”
“뭐?”
그때, 가파른 언덕을 따라 누군가 소년을 불렀다.
“알릭스!”
소년은 사내의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리더니 공을 끌어안고 달려 내려갔다.
“알릭스,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잖아.”
소년이 내려가기 전에 사내가 먼저 언덕 위로 올라왔다.
그가 알릭스의 머리를 거칠게 한 번 쓰다듬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
사내는 들 한복판에 석상처럼 서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라비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적갈색 눈동자, 잘 빚어 세운 콧대와 그 아래 놓인 선명한 빛깔의 입술.
바람에 흩날리는 보들보들한 갈색 머리.
사내가 서 있는 모습은 풍경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그림과도 같았다.
그대로 얼어버린 라비엘리를 마주하며 루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레이디.”
라비엘리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웠으나 보고 싶지 않았고, 해야 할 말이 산더미인 동시에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레브리안에게서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노예 시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사람, 각지의 노예 시장을 떠돌면서 아이를 찾고 있나 봐.’
‘뭐?’
‘에몬 질의 여관에서 소동을 벌인 사람의 아들을 찾고 있대. 하지만 공작님께선 어려울 거라고 하셨어. 너무 오래전 일이고 어린아이들은… 중간에 잘못되는 경우도 많은가 봐.’
‘…….’
‘노예상들은 워낙 거칠고 험해서, 그 사람도 위험해질 수 있대. 그 아이를 찾는 조건으로 거액을 걸었나 봐. 한데 그런 곳에서 돈이 많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잖아.’
‘…….’
‘언니?’
‘레비, 그 사람 마지막으로 목격된 게 어디인지 알고 있니?’
라비엘리가 위태로운 얼굴로 서 있을 때, 루시안이 알릭스에게 말했다.
“집으로 곧장 가야 한다. 알았지?”
“아저씨는요?”
소년은 라비엘리를 한 번 힐긋거리며 물었다.
“금방 갈게.”
“빨리 오셔야 해요.”
그러더니 공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는 언덕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소년이 사라지자 루시안은 라비엘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고 들풀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누웠다.
“왜.”
라비엘리가 가까스로 첫 마디를 뗐다.
“왜 이렇게 사람이 무모해요?”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달리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루시안은 가만히 라비엘리를 마주하더니 건조하게 대답했다.
“저 아이를 꼭 찾아야만 했어요.”
라비엘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루시안이 깨어났던 날, 아이를 꼭 찾겠다고 한 건 루시안이 아니라 그녀였다.
‘어디로 팔려 간 지도 모를 아이를 대체 어디서 찾겠다는 겁니까?’
‘에몬 씨가 노예상에 팔았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르죠.’
‘이봐요, 상냥하지만 순진한 아가씨. 에몬의 입을 열게 하려면 적어도 그 아이를 팔면서 받은 돈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이 줘야 할 겁니다. 그럴만한 돈이 없다면 전국에 있는 노예상을 전부 뒤지는 수밖에.’
‘그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겠다고요?’
‘할 수 있다면요.’
‘왜?’
‘꼭 이유가 분명한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신이 하신 일도 그럴 거로 생각해요.’
“난 그저 당신이 움직이기 전에 저 아이를 찾았을 뿐이에요.”
루시안의 음성이 차갑게 식었던 라비엘리의 가슴 위에 스며들었다.
라비엘리는 조금 전 언덕 아래로 내려간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렸다.
소년이 돌아옴으로써, 소년과 아버지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바이젤 루오 씨는 괜찮으신가요?”
여관에서 나온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받았던 고통을 참작해서 선고가 내려졌지만 얼마 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루시안이 보석금을 냈으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마이어 가는 그럼.”
라비엘리가 다시 목소리를 내자, 루시안은 그녀가 정말 궁금해할 소식을 들려주었다.
“마이어 가에 관한 건 전부 로제 클렌스에게 일임했습니다. 그녀가 내 새로운 집사예요.”
“로제가요?”
“네, 그리고 메이든은 마이어 가에서 나와 내 재단에서 일하고 있어요. 후작의 막대한 재산을 운용해서 로튼에 공공사업장과 병원을 지을 예정이거든.”
라비엘리는 세게 말아쥐었던 손을 조금 풀었다.
제가 정체되어있는 동안에도 루시안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미처 살피지 못한 이들을 돌보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럼 당신은.”
라비엘리가 차마 잇지 못한 뒷말은 여기 계속 있을 거냐는 질문이었다.
물론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알았다.
루시안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였다.
“루오 씨와 알릭스가 직접 와인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
“지금은 땅을 보고 있어요.”
“땅이라고요?”
피카르디는 훌륭한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곳이었다.
가장 더운 달과 추운 달의 기온 차가 적고 일조량이 풍부해 농사꾼들의 천국으로 불렸다.
“우선 포도 농사부터 시작하려고.”
그러더니 잘 익은 포도향이 느껴지도록 싱긋 웃었다.
“그렇군요.”
라비엘리는 입술을 한번 붙였다 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비엘리.”
그는 조심스레 라비엘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미안해요.”
루시안의 차분한 음성이 라비엘리를 다시 한번 붙잡았다.
“미안해요, 라비엘리.”
“당신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는 걸 아는데.”
하지만 지금 그를 찾아온 건 루시안이 아니라 그녀였다.
“그런데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더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매 순간 루시안을 그리워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그가 보고 싶었다.
“…….”
“생각해보면 나 역시 늘 진실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는데.”
라비엘리는 차마 루시안을 바라보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당신을 좋아하면서도 내 마음을 계속 숨긴 것처럼.”
“라비엘리.”
“함께 있고 싶으면서도 아니라고 말했던 것처럼.”
라비엘리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그래요, 이제 나도 모르겠어요! 사기꾼이든 거짓말쟁이든 상관없어.”
그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시안은 그대로 다가가 라비엘리를 안아주었다.
그녀가 홀로 울지 않게, 더는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도록.
때로는 고통스러웠고 이따금 즐거웠던 추억이 하나가 되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더는 낯선 자극도, 충동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은 같은 온도로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