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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28)화 (128/136)

128화

라비엘리가 루시안을 다시 만난 건 이온가의 정문 앞이었다.

“라비엘리.”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라비엘리는 반사적으로 멈추었으나, 이내 못 들은 척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라비엘리, 잠깐만.”

하지만 다시 그녀를 불러세운 목소리에 주저하고 말았다.

라비엘리는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꼭 끌어안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저를 불안하게 하는 동시에 무섭도록 익숙한 향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예상했던 첫 마디였다.

루시안이라면 이미 제 행방을 알아보고 니엘 페른과도 이야기를 끝냈을 것이다.

어차피 갈 곳이라고는 레브리안이 있는 곳뿐이었다. 저를 찾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이렇게 금방 마주칠 줄은 몰랐다.

“잠깐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아뇨, 금방 들어가 봐야 해요.”

높낮이 없는 음조로 대답했지만 루시안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라비엘리.”

“당신과 할 얘기 없어요.”

“그럼 내 이야기만이라도 들어줘요.”

라비엘리는 말아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뇨.”

“부탁할게요. 오늘은 여기 온 첫날이니까.”

이어진 음성에 라비엘리는 들고 있던 종이봉투가 구겨질 만큼 몸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천천히 돌아섰다.

그곳에 루시안이 서 있었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연한 갈색 머리, 다소 여윈 듯한 눈매와 조급함으로 벌어진 입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동시에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라비엘리가 돌아서자 루시안은 어깨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가 내뱉은 안도의 한숨이 라비엘리의 손등에 닿았다가 이내 흩어졌다.

“고마워요.”

하지만 라비엘리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라비엘리, 많이 놀라고 내게 실망했으리란 거 알아요.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거짓처럼 보이고 믿을 수 없다는 것도.”

차라리 저를 혐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면 나았을까.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해야 할 말을 전부 준비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라비엘리의 눈앞에 마주하자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난 당신이 무서워요.”

“라비엘리.”

“미안하다고 말하는 당신 입이, 내게 사죄하는 당신 표정이 무섭다고요.”

루시안이 손을 뻗으려 했으나 라비엘리가 먼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당신이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아무리 관찰해도 알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어.”

“…….”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거짓말이었으니까.”

“라비엘리.”

“당신은 그냥 그런 인간이라 그랬던 거예요.”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할게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때문인가요? 나를 죽이러 왔어요?”

“라비엘리, 그건-”

“그럴 생각으로 왔다면 마음대로 해요.”

라비엘리는 로브를 벗더니 바닥에 떨어뜨렸다.

“당신이 좋아하는 총으로 쏠 건가요? 아니면 독살? 눈앞에 있으니 목을 조를 생각인가요?”

“…….”

“그게 당신들의 마지막 작전이라면 그렇게 해요, 얼마든지.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라비엘리, 미안해요. 당신이 얼마나 놀라고 상처받았을지…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하겠어.”

“그럼 찾아오질 말았어야지. 그럼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말았어야지!”

루시안이 알 수 없는 사내라고 생각하면서도, 라비엘리는 커지는 제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저를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이길 바랐다.

그렇게 믿었다.

이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길 원했다. 그랬다면, 과거와는 상관없이 그와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결코 저를 해할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존재조차 의심스러웠다.

“라비엘리.”

다시 스며드는 루시안의 음성이 라비엘리를 괴롭게 했다.

“다신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루시안은 처음보다 차분해진 음성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이런 말로 속죄할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전부 잊어요. 마이어 가에서의 일도, 나도. 과거는 전부 잊고 행복하길 바라요.”

그게 마지막이었다.

루시안은 뒤로 두어 걸음 느리게 걷더니 라비엘리를 향해 흐릿한 미소만 남긴 채 돌아섰다.

* * *

“언니.”

“…….”

“엘리 언니?”

“…….”

“언니!”

라비엘리는 그제야 느릿하게 머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레브리안이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괜찮아?”

“응.”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수프가 아주 맛있네.”

라비엘리가 입가에 미소를 그려 넣자 레브리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언니, 그거 수프 아니잖아. 물그릇이라고.”

“아.”

레브리안이 등 뒤에 서 있던 하녀에게 눈짓하자, 하녀가 잽싸게 걸어가선 라비엘리의 물그릇을 치웠다.

그녀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얼굴을 굳혔다.

“언니, 무슨 일인데 그래.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 같아.”

레브리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라비엘리에게 물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불러도 듣지도 못하고. 클레어 말로는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책만 읽는다면서.”

“조금 피곤해서 그래.”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봐. 답답해.”

“…미안해, 레비.”

“아니,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레브리안은 제가 너무 심했나 싶었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언니. 언니가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줄 수는 없나 싶어서 그래.”

라비엘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조금 정리할 일이 있어.”

약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갔다.

만난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한 달이면 충분히 마음을 추스를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억은 얄궂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기는커녕 보다 선명해졌다. 오히려 루시안을 마주한 그 날보다 지금 더, 라비엘리의 가슴은 위태롭게 뛰고 있었다.

“정리…라니?”

레브리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라비엘리는 손을 내저었다.

“그냥, 별일 아냐.”

“공작님께서도 걱정이 많으셔. 우린 언니를 돕고 싶은 마음뿐이야.”

“…….”

“뭐든 좋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해줬으면 해.”

라비엘리가 씩씩한 표정을 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레브리안의 얼굴에 얼핏 묘한 기운이 스쳐 가는가 싶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사람 만났어?”

“아니.”

라비엘리는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레브리안이 설핏 웃으며 대꾸했다.

“거짓말 진짜 못하는 거 알지?”

“그래, 만났어.”

체념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레브리안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그 사람 얘기라면 하고 싶지 않아.”

“언니, 그러니까 대체 뭐가 문제냐고.”

“날 속였다고 했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죽어가는 친구를 위해서. 그냥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더는 그 사람 못 믿겠어.”

“그래, 물론… 내가 언니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무섭고 끔찍한 일이긴 해.”

“난 지금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그냥 그가 무섭고 두려워.”

“그래도 언니를 위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 거야. 아니, 완전히 진심이었어.”

“…….”

“그의 가여운 인생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 줘. 언니를 마주하는 내내 괴로웠을 거야. 어쨌든 지금은 전부 다 지난 일이잖아.”

라비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레브리안이 들릴 듯 말 듯 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작님께선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라비엘리가 멈춰 서자 레브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언니.”

레브리안은 입술을 꾹 붙였지만 라비엘리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어차피 언니랑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않을 거라 믿어.”

이마를 두어 번 문지른 레브리안이 한숨 같은 말을 떨구었다.

“그 사람, 지금 노예 시장에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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