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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27)화 (127/136)

127화

루시안이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니엘은 막 잠에서 깬 상태였다.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에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루시안은 말없이 니엘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몇 달 전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방 안 풍경과 익숙한 알코올 냄새. 반면 친구의 얼굴은 전과 비교해 더 야윈 듯 보였다.

“눈을 떴는데 내 친구가 보이다니. 꿈인가.”

니엘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루시안을 마주했다.

“내가 지금 페른의 저택에 있다니. 환상인가.”

루시안이 말하자 니엘은 치아가 전부 드러날 만큼 활짝 웃었다.

“가까이 와봐. 그 잘난 얼굴 좀 보게.”

어떻게 지냈냐는 말도, 잘 지냈냐고도 묻지 않았다.

온종일 누워서 지내는 이에게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누군가를 죽이러 간 이의 마음이 평화로웠을 리도 없으니 말이다.

그저 말없이 어딘가 낯설어진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쟁반을 받쳐 든 엘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두 분이 함께 계신 모습을 보니 행복하네요. 루시안 도련님, 땅콩 파이부터 좀 드세요.”

“고마워요.”

엘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니엘을 조심스레 일으켜주었다.

“주인님, 어디 불편하신 데 있으세요?”

“아니, 아주 좋아.”

“오늘은 한 번에 성공했네요.”

엘자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언제든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엘자가 밖으로 나가자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루시안이 찻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모습을 지켜보던 니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건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두 사람의 대화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

“라비엘리는 어디 있지?”

루시안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건조하게 물었다.

“루시안, 지금 너와 내가 대화하고 있잖아.”

“…….”

“다른 사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걸.”

“니엘, 라비엘리가 지금 어디 있냐고 묻고 있잖아.”

“이런 이런.”

니엘은 눈을 감더니 베개에 머리를 기대었다.

“몇 달 만에 만난 형제에게 궁금한 게 고작 그것뿐이야?”

“대답해.”

그러자 니엘이 이마에 주름을 그려 넣었다.

“그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뿐이라면 대답해야지.”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루시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였어.”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니엘이 하는 말은 분명 거짓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애를 써야 했다.

니엘은 루시안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불러서 죽였어.”

“…….”

“편지를 보냈거든. 루시안 마이어의 눈을 피해 나를 찾아오라고. 그랬더니 그 먼 길을 달려 내게 와주었어. 정말 고마운 일이지?”

니엘은 루시안을 처음 봤을 때처럼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의심이 많은 여자더군. 내가 차에 독이라도 탔을까 봐 마시지 않았어. 너와 함께 지내면서 배운 것이겠지. 그녀의 행동거지와 말투 속에서 어쩐지 너를 느낄 수 있었어. 내 친구가 이 여자를 처리하는데 어려움을 겪겠다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지. 그래서 내가 해결했어.”

그러더니 차고 매서운 음성을 냈다.

“친구 좋은 게 이런 거지, 안 그래?”

루시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포크를 집어 들더니 엘자가 가져온 땅콩 파이의 귀퉁이를 잘라내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오물거리며 맛을 음미하는 것이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솜씨가 더 좋아지셨네. 갈 때 파이 레시피라도 배워가야겠어.”

루시안의 말에 니엘이 신경이 곤두선 음성을 냈다.

“가다니?”

“내 집으로 돌아갈 때 말이야.”

“루시안, 네 집은 여기야.”

“미안하지만 내 집은 로튼에 있어.”

루시안이 다정스레 웃었지만, 니엘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 집?”

“니엘.”

루시안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후작은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마비되었어. 혀까지 완전히 굳어서 말을 할 수도 없지.”

“그 기쁜 소식을 왜 이제 말하는 거야?”

니엘의 얼굴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게 구겨졌다.

“세상에,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무슨 짓을 한 거지? 설마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어?”

니엘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뜨렸나? 아니면 독이라도 쓴 거야? 테아노에게 직접 손을 대는 건 위험했을 텐데 어떻게 한 거지? 그 쥐새끼처럼 교활한 사내를 대체 어떻게 요리한 거야!”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루시안은 메마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제부터 테아노의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할 거야.”

“실험이라니.”

“방법을 찾아 볼 생각이야.”

니엘의 입술이 조금 벌어지자 루시안이 다시 말했다.

“네가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니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그러졌던 미간이 펴지고 눈가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마치 얼굴에 있는 근육이 전부 풀려버린 것처럼.

“루시안.”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능할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해볼 생각이야.”

“내게 헛된 기대감을 품게 하지 마. 그건 날 너무 괴롭고 비참하게 하는 짓이니까.”

“단순히 복수하는 게 널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

“나는 네 고통과 증오를 반의반도 이해하지 못해. 하지만 후작에 대해선 너보다 잘 알고 있어.”

“…….”

“그는 라비엘리 르휜을 사랑하지 않았어. 그녀를 죽였어도 테아노는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았을 거야. 그저 아쉬워했겠지. 고작 그 정도의 감정을 위해 사람을 해칠 수는 없어.”

니엘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루시안이 막아섰다. 그런 뒤 계속 말을 이어갔다.

“후작은 역겨운 나르시시스트에 불과해.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애초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니까.”

그즈음 니엘은 차 한 모금이 간절했으나 루시안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루시안은 어딘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비슷한 표정과 제스처였으나 니엘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단순히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잘 다듬어진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러프하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과는 차이가 있었다.

니엘은 타는 듯한 갈증을 참아내며 루시안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이번에는 루시안이 침묵했다.

“말해봐, 루시안. 너는 어떻지?”

니엘은 루시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게 괴로웠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듭 물어야 하는 것이 우울했다.

“그 여자를 사랑했나?”

“가여운 여자야.”

루시안의 대답에 니엘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가엽다고?”

“모든 걸 잃고 이제야 천천히 제 인생을 똑바로 마주하려 하고 있어.”

“대답해.”

“사랑했냐고 묻는 건 잘못됐어. 난 지금 그 여자를 사랑해.”

“…….”

“루시안, 너는 결국.”

니엘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제 감정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태연히 사랑을 고백하는 친구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낀 탓인지, 아니면 완전히 굳어버린 육신 탓에 제 이성마저 비뚤어졌기 때문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루시안, 그녀는 가문이 무너졌을 때 이미 죽은 여자야.”

“죽지 않고 살아있어.”

“진작 죽었어야 할 여자였다고! 너는 알량한 감정으로 나와의 약속을 어긴 거야!”

“그럼 너는?”

“뭐?”

“너도 그날 이후 이미 죽은 사람인 건가?”

루시안의 말에 니엘은 호흡하는 법조차 잊고 그를 쳐다보았다.

친구의 황망한 표정을 마주 보며 루시안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건 없어. 죽어야 할 사람도, 죽어 마땅한 사람도! 알량한 감정으로 약속을 어겼다고? 내가 한 약속은 후작을 무너뜨리고 네가 겪은 고통을 되돌려주겠다는 거였지 불쌍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었어!”

눈에 핏발이 선 루시안이 니엘을 마주한 채 악을 쓰고 있었다. 그는 연신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말했다.

“네가 라비엘리를 죽였다는 말 믿지 않아.”

“내가 이러고 있으니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순진하네.”

니엘이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럼 지옥에라도 가서 찾아봐.”

루시안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돌아섰다.

“니엘, 더는 소모적인 감정이 우리를 갉아먹게 하지 말자. 그게 너와 나를 해치게 두지 말자.”

“…….”

“이제 복수는 끝났어.”

등 뒤로 아무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다시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쾅.

문이 닫히자 니엘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루시안. 내 고통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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