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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26)화 (126/136)

126화

며칠 후, 루시안을 태운 마차는 매끄럽게 포장된 길을 달려 어느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먼 길을 떠났다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는데, 표정은 전장에 도착한 병사와도 같았다.

‘레브리안, 그럼 편지를 일부러 보냈단 말입니까?’

‘네, 언니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

‘아무것도 묻지 말고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래도 너무 걱정돼서 계속 물었더니, 힐스에 있는 의원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그런데 꼭 혼자 가야 한다고 해서.’

‘힐스에 있는 의원이라고요?’

‘네, 의원을 만나러 간다니 위험한 일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난 뒤에는 꼭 이온으로 온다고 했고요.’

‘그런데 오지 않았다는 겁니까?’

‘네.’

루시안은 굳게 닫힌 문을 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이제 이 문을 두드리고 바로 위에 누워있을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라비엘리는 이곳에 다녀갔을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여기까지 왔을까.

니엘을 만나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왜 내게 먼저 묻지 않고.

“루시안 도련님?”

멀리서 들려온 음성이 루시안의 상념을 흐트러뜨렸다.

고개를 돌리자 엘자가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세상에, 맞네! 우리 도련님 맞아!”

엘자는 들고 있던 달걀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고, 도련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세상에,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 왜 더 마르신 거예요.”

엘자는 루시안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잘 지내신 거죠? 어디에 계셨어요. 소식이 뜸해서 정말 걱정했어요.”

“엘자, 소식이 뜸해서 걱정한 거 맞아요?”

루시안의 첫 마디에 엘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하지요!”

“니엘이 내 얘기 안 했나 보네. 말하기 좋아하는 그 녀석이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단 말입니까?”

루시안이 눈을 가늘게 뜨자, 엘자는 짐짓 당황한 얼굴로 눈을 피했다.

“어휴, 내가 도련님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걸 깜빡했네. 어서 들어가 보세요. 나보다는 우리 주인님께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셨으니까.”

미소를 머금은 루시안이 돌아섰을 때였다.

“참, 도련님.”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음성으로 엘자가 그를 불렀다.

“?”

하지만 루시안이 돌아서자 엘자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녜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루시안은 엘자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걸, 그게 어쩌면 라비엘리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걸 직감했다.

물론 니엘을 만나기 전 듣고 싶기도 했으나 엘자가 곤란해지는 건 원치 않았다.

“그래요, 오랜만에 엘자의 차를 맛볼 수 있게 되어 기쁘군요.”

루시안은 부러 화제를 전환하며 웃어 보였다.

“제가 우려내는 차가 그리우셨죠? 땅콩 파이는요?”

“아주 많이요. 살이 빠진 건 엘자의 파이를 먹지 못해서라고요.”

“기대하세요. 어쩐지 오늘 아침 파이를 평소보다 더 크게 굽고 싶더라니!”

엘자가 호들갑스럽게 말하자 루시안은 싱긋 웃더니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엘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얼마 전 부서질 듯 여린 아가씨가 다녀갔다고 말할뻔했다.

‘그건 안 되지. 먼저 말했다가 주인님께서 아시는 날엔.’

엘자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달걀 바구니를 서둘러 집어 들고는 루시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이곳은 페른 가의 저택이었으나 그의 집이기도 했다.

기억조차 흐릿한 나이에 부모를 잃고 굶어 죽을 뻔한 루시안을 거두어준 건 니엘의 아버지였다.

어릴 적부터 병약해 늘 집안에만 있던 니엘에게 루시안은 친구이자 형제였다.

니엘은 루시안의 목숨을 구했고, 루시안은 니엘의 삶을 바꾸었다.

‘니엘.’

니엘에게 마비가 찾아와 온몸이 굳어버렸을 때, 루시안은 차라리 제게 병이 옮겨지기를 바랐다.

그러다 원인이 테아노 마이어 후작에게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는, 그를 대신해 복수하겠다고 결심했다.

드디어 방문 앞에 선 루시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로튼으로 떠나기 전날 밤의 장면이 스쳐 갔다.

* * *

“니엘.”

새벽녘 안개 같은 사내의 음성이 침대 위에 내려앉는다.

그러나 니엘은 미동도 없이, 얼마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살아있다는 걸 눈치챌 만큼 곤히 잠들어있었다.

루시안은 누워있는 사내를 감싼 이불이라도 정리해줄까 싶어 손을 뻗었으나 이내 거두었다.

턱 바로 아래까지 당겨진 이불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침대 너머 창문과 정교하게 제작된 방 안의 가구,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전부 침대 주인의 취향대로 주문하고 제작한 것이었다.

탁자는 떡갈나무로 만든 것으로 푸르지도 선명하지도 않은 녹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루시안은 그것이 곰팡이처럼 보인다며 니엘을 놀리곤 했다.

“저 바보 같은 탁자는 끝내 빼질 않는군.”

음울함을 감추려 루시안은 애써 가벼운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바닥으로 떨어져 마루에 천천히 스미고 말았다.

양 볼이 오목하게 느껴질 만큼 앙상히 마른 사내를 빤히 보던 루시안이 조심스레 일어섰을 때였다.

“……루시안.”

마치 땅속에서 막 피어난 듯한 니엘의 음성이 루시안의 발목을 거머쥐었다.

“니엘.”

루시안이 다시 몸을 굽히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먼저 할 말을 찾아낸 니엘이 먼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차림을 보니 오늘 떠날 생각이로군.”

“그래, 맞아.”

가구 고르는 안목은 없었으나 눈썰미는 훌륭했다.

“짐은?”

“걱정 마. 네 돈으로 패커를 고용했거든.”

“훌륭하군.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네 짐이 아니라 내 돈인 거 알고 있지?”

니엘의 농담에 루시안이 처음으로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루시안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사이 무거운 눈꺼풀을 든 니엘이 입을 열었다.

“루시안, 부탁이 있어.”

“뭐든지 말해봐.”

“절대 그를 죽여선 안 돼.”

메마른 음성이 루시안의 목을 타고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그는 이 단단하고 서늘한 족쇄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그건 복수가 아냐. 죽음은 극단적인 평화일 뿐. 나는… 그가 평온해지는 걸 바라지 않아.”

“그래.”

“대신 그 여자는 반드시 죽여줘.”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니엘이 덧붙였다.

“그녀가 후작의 인생에 깊은 영향력을 미칠 즈음이어야만 해. 그가 가장 처절한 모습으로 울게 해 줘. 로튼의 약재상을 통해 알아봤는데 이미 그 여자에게 빠져 정신 못차린다더군.”

“그렇게 하지.”

“르휜은… 가문이 무너지고 어차피 죽으려고 했던 여자야. 그녀를 죽이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돼.”

그건 니엘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거야. 아름답기로 여기까지 소문이 날 정도인 걸 봐선… 보통이 아닐 테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머릿속에 선명했으나 루시안은 부러 한 번 더 물었다.

“라비엘리. 라비엘리 르휜.”

“라비엘리 르휜.”

루시안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대단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 목숨보다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 한번은 넘어야 할 고비일 뿐이다.

“기억해, 루시안. 곧 시들어버릴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마. 물론 네가 그럴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니엘의 말에 루시안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이만 갈게. 작별 인사는 너무 길게 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그의 건조한 음성에 니엘이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배웅은 하지 못하는 걸 이해해.”

“배웅 없이 보내다니. 날 다시 볼 생각은 하지도 마.”

“그래, 난 이제 쉬어야겠어.”

니엘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호흡은 조금 전보다 빨라진 듯했고, 곱게 맞닿아있던 입술은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지금 나눈 몇 마디의 대화 탓이리라.

“갈게, 니엘.”

루시안은 성큼성큼 걸어서 문고리를 쥐었다. 청동으로 만든 꽃 모양이었는데 이것 역시 루시안의 취향은 아니었다.

차디찬 쇠붙이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자르르 퍼진다. 그것을 바짝 잡고 비틀자 열린 문틈으로 냉기가 스몄다.

벌어진 문 사이로 새로운 운명이 밀려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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