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루시안은 손에 든 편지를 차분히 내려놓았다.
편지는 클라인 이온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고급스러운 편지지 안엔 루시안이 기대했던 말은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이마를 짚은 뒤 고개를 떨어뜨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두통이었다.
똑똑.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모습을 보인 건 로제였다.
루시안이 고개를 들자 로제가 어딘가 주춤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하지만 루시안 앞에 서자, 그녀는 다부진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오전에 이온가에서 보낸 편지가 왔다고 들었는데.”
로제는 두 손을 모으며 뒷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지금 이온가에 계신 건가요?”
“아니요. 그곳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동생을 만나러 가신 게 아니에요? 왜… 이온에 없으시죠?”
그건 루시안도 알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루시안의 대답에 로제는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더니 앞치마를 쥐었다가 놓으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대체 우리 아가씨는 어디에 계신 거예요?”
레브리안에게 간다던 라비엘리는 그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부재가 길어져 루시안은 클라인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안타깝지만, 라비엘리 르휜 양은 이온에 오지 않았습니다.
편지도 연락도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알아보고 있으니, 르휜 양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그럼 어떻게 해요?”
입술까지 하얗게 질린 로제가 결국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불행한 일들이 전부 떠올랐다.
“설마 이온에 가시던 중에 마차가.”
로제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을 막자 루시안이 차분히 대꾸했다.
“라비엘리는 처음부터 이온에 갈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네?”
루시안은 마치 보란 듯이 두고 간 레브리안의 편지를 생각했다.
그건 분명 레브리안이 보낸 게 맞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럼 어디로 가신 걸까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설마 나쁜 일을 당하신 건 아니겠죠?”
아닐 거라 믿었지만 루시안 역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일단 이온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루시안은 황망한 눈으로 저를 쫓는 로제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같이 갈게요.”
로제는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더니 루시안에게 말했다.
“아가씨가 걱정돼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부탁이에요, 저도 가서 아가씨를 찾을 수 있게.”
“로제.”
루시안은 돌아서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지금 집 근처에서 놀다 길을 잃은 어린애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
“로제는 마이어 가에 남아서 이곳을 지켜요.”
갑작스러운 말에 로제가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이곳을 지키다니요?”
“라비엘리도 없고 나도 없다는 걸 알면 렉토르가 언제 다시 올지 모릅니다.”
그가 마우드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로제의 미간이 씰룩거렸다.
그녀는 앞치마를 들어 눈매를 닦더니 루시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로제, 이곳의 집사도 사용인들도 전부 테아노 후작이 고용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물론 그분의 아들이지만, 이 집에서 나를 후작의 대리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녜요, 무슨 그런 말씀을.”
루시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로제가 헛기침을 했다.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겠죠. 나 역시 서두르진 않을 겁니다. 다만 지금은 라비엘리를 찾아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라 하는 말이에요.”
“?”
“그러니까, 지금 이 집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에 로제는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부담스러운 동시에 알 수 없는 기운으로 가슴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전에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감정, 라비엘리가 저와 함께 가자고 제안했을 때와 비슷했다.
“만약 마우드 양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렉토르가 후작가에 머물면 좋겠습니까?”
로제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루시안이 나른히 웃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죠.”
“예?”
“일단 기다려요.”
테아노가 누워서 지내게 된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처음 며칠은 로튼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마우드는 몇 날 며칠을 소리 내 울었고, 마이어 가는 그의 비극을 위로하기 위한 사람들로 끊이질 않았다.
그사이 루시안은 테아노가 서명해 둔 서류를 법원에 제출했고, 마이어 가의 아들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일부는 저택 내에 테아노를 노린 자가 있을 거로 의심했다.
소문은 점점 불어났으나 루시안이 후작의 재산으로 재단을 세우더니 공공사업장과 무상 진료 병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함과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마우드는 애초에 약속한 것과는 다르게 계속 마이어 가에 남고 싶어 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냉정했다. 대신 다른 곳에 가서 충분히 정착할 만큼의 크랜을 쥐어 내보냈다.
마우드를 제거하는 편이 깔끔하다는 걸 알았지만, 루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물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찾아내 죽일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눈치 빠른 마우드는 위험한 도박은 하지 않기로 하고는 곧바로 후작가를 떠났다.
그렇게 후작가의 상황이 정리되고 있는데 이온가에 다녀오겠다며 떠난 라비엘리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로제를 돌려보낸 뒤, 루시안은 곧바로 집사 메이든을 불렀다.
“메이든.”
“네, 주인님.”
“2주 정도 이온에 다녀올까 합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루시안은 사지가 굳어버린 테아노를 극진히 모실 것을 당부하고 사용인들의 월급을 전부 두 배로 올려주었다.
불필요한 주문이 없고 자유분방한 새로운 주인을 환영하지 않는 사용인은 없었다.
사실 훨씬 더 좋아했다.
단 한 명, 집사 메이든을 제외하고 말이다.
“마이어 가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제가 없는 동안 준비해 드린 약재는 빠짐없이 챙겨드리세요. 근육을 이완하게 하고 편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돕는 약이니 빠뜨려선 안 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조금이라도 상태가 좋지 않으시면 이온 가로 바로 연락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주인님.”
메이든이 물러나려고 했을 때였다.
“참, 메이든.”
“네.”
루시안은 메이든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나이 지긋한 집사는 마이어 가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했다.
그는 순종적인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사실 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루시안은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않고 들었으면 좋겠군요.”
“네, 말씀하십시오.”
메이든은 태연히 대답했으나 사실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메이든이 마이어 가를 위해 오래 헌신해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당연하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죠.”
혹시 일을 그만두라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오래 지켜본 건 아니지만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해오셨는지 압니다. 그래서 사실 마이어 가의 집사로 있기에는 어딘가…….”
메이든은 결국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테아노가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고 갑자기 아들이 나타났을 때부터, 언젠가는 마이어 가에서 나가야 할 날이 올 거라 예상했다.
그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을 뿐이다.
메이든은 입매에 힘을 주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집사로만 계시기에는 아까운 분이시죠.”
젊은 사람은 이런 입바른 말로 사람을 내치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메이든, 재단에서 일해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재단에는 메이든같이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필요해요. 이제 마이어가가 아니라 로튼을 위해 일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주인님.”
루시안은 앞으로의 제 계획을 차분하지만 명료한 어조로 설명했다.
공공사업장을 만들고 학교를 건립하는 일, 기금운용과 위탁 등을 이야기하며 로튼의 청사진을 그려내자 메이든은 전에 없이 흥분한 표정이었다.
“그럼 수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세상에… 제게 그런 큰일을 맡기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메이든은 좀처럼 벅찬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루시안에게 물었다.
“아, 그러면 마이어가의 집사는 새로 고용하십니까?”
“아뇨.”
루시안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내일부터 로제 클렌스가 마이어 가의 집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