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누가 누구더러 악마라는지 모르겠군.”
루시안이 무심하게 내뱉자 마우드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우드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루시안이 준비한 약을 자연스럽게 먹이고, 그가 억지로 구역질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 약을 먹고 적당히 물을 마시게 하는 일.
테아노에게 약을 먹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먹는 음식과 음료는 하녀장이 철저히 관리했다.
운 좋게 약을 음식에 타는 일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쓰러지거나 하면 또 곤란한 일이었다.
“자, 거기 잘생긴 악마님, 나 이제 뭘 하면 되지?”
마우드는 제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내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장례식 준비? 검은 상복을 사야 하나요?”
테아노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저 그가 가진 돈과 안정적인 삶을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테아노가 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본인이 후작을 죽였다고 광고라도 할 셈인가?”
루시안이 고개를 젓자 마우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상한 건 입기 싫거든.”
“아직 죽지도 않았어.”
루시안이 테아노를 손으로 가리키자 마우드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뭘 하면 되냐고.”
“글쎄, 구경?”
“나 사람 죽는 건 보기 싫어요. 이제 더 시킬 일 없으면 그만 가도 되겠지?”
루시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마우드가 테아노의 뺨을 두 손에 쥐고는 가볍게 키스했다.
“적당히 눈감고 받아주었으면 좋았잖아. 자기, 날 너무 쉽게 봤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생각해봤어야지.”
뺨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고는 싱그럽게 웃었다.
“가여운 사람, 안녕.”
테아노가 눈을 크게 떴다. 흰자에 핏발이 섰지만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참, 그리고 사실 나 임신 안 했어.”
그러더니 사뿐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테아노는 그 순간에도 어떻게든 움직이려 애를 썼지만, 마치 몸을 밧줄로 묶어놓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나마 움직이는 게 가능한 건 눈동자뿐-
그마저도 힘을 주면 모래알 위에 굴린 것처럼 따가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빌어먹을!’
아무리 애를 써도 지금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서, 설마… 마약을 먹이고 나를.’
마우드가 나가고 루시안과 단둘이 남자, 테아노는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나를 죽이려 부러 마약을 잔뜩 먹인 것이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해.
이대로 있다간 저 사악한 것의 손에 죽고 만다!
“어쩌나, 평생 인간의 몸을 연구하고 약초를 만졌을 텐데.”
루시안은 길게 한숨을 섞어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제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하다니.”
그의 말에 테아노는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아, 왜 모르는지 알겠다. 남의 몸에만 실험해서 약을 먹었을 때 어떤 감각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거야.”
테아노는 그제야 마우드가 제게 먹은 것이 평범한 마약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도 의사라서 그런 호기심이 늘 있거든. 새로 배합한 이 약을 투약하면 어떻게 될까… 몸에 차곡차곡 쌓였다가 나중에 발현될 수도 있을까.”
“…….”
“의학의 발전을 위해 그런 희생 정도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려나?”
“…….”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해? 훌륭한 의사잖아. 누군가의 희생으로 신약을 개발하면… 그건 숭고한 희생일까?”
“…….”
“아, 그래. 숭고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좋아, 그럼 아버지는 오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거야.”
루시안은 갑자기 엄숙한 얼굴로 손뼉을 치는 시늉을 하였다.
“내가 꽤 여러 날 공들여 만든 건데… 렉토르 양이 제대로 했나 모르겠네. 적당히 먹으면 마약처럼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지만.”
“…….”
“정해진 용량을 넘기면.”
거기까지 말한 루시안은 천천히 걸어선 테아노 가까이 다가왔다.
“온몸이 통나무처럼 굳어지거든.”
루시안이 남긴 말은 테아노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어느덧 제 몸을 사로잡았던 나른한 기운은 사라지고 완전히 뻣뻣하게 굳은 육신만 남아있었다.
테아노는 몸을 움직이고 싶었으나 그건 마음뿐, 손도, 머리도 하다못해 혀를 움직이는 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꼴을 르휜 양에게 보여 주고 싶은데. 저택에 없어서 애석하네.”
루시안이 교교히 웃더니 라비엘리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런 꼴을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 아니다, 마음이 약한 여자라… 역시 없을 때 처리하는 게 낫겠지?”
말을 마친 루시안이 소파에 있던 쿠션을 하나 집어 들더니-
테아노의 얼굴에 가까이 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테아노는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썼으나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안돼, 젠장! 제발, 메이든! 메이든!’
쿠션이 얼굴에 완전히 닿았다.
퀴퀴한 섬유 냄새가 순식간에 덮쳐왔다.
나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이구나. 감히 나를 이런 식으로 죽이려 해!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이 교활한 자식. 가만두지 않겠어!
아냐,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 제발 살려줘, 제발……!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테아노는 헉헉거리며 어떻게든 제 얼굴을 막은 것을 피하려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의식이 흐릿해진다. 온몸이 땀으로 젖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이제는 끝이라는 생각에 눈이 뒤집히는데-
루시안은 슬그머니 쿠션을 아래로 내리더니 테아노와 눈을 맞추었다.
“아, 생각이 바뀌었어.”
그는 쿠션을 옆으로 내려놓더니 손을 두어 번 털었다.
“여기까지는 라비엘리를 괴롭힌 벌이야.”
루시안은 고르고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표정이 왜 그렇지? 뭔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테아노를 쳐다보았다.
“왜, 그냥 죽였으면 좋겠어? 그런 거야?”
테아노는 이번에도 신음을 한 번 흘리며 헐떡였지만, 속으로 외치고 있는 것은 한 글자도 내보낼 수 없었다.
괴롭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를 정말 두렵게 하는 건, 루시안이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사내라는 점이었다.
“당신을 사랑한 여자가 있었어. 당신이 이상한 약을 먹이고 제 몸에 실험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을 떠나지 못했지.”
“…….”
“그 가여운 여인은 저 때문에 아들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했대. 결국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어.”
루시안의 목소리는 어느덧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여자가 바로 제노베파야. 혹시 기억해?”
“으!”
겨우 내뱉은 것은 그저 루시안의 조소만 짙어지게 했다.
“좋아, 이제 연극은 끝이야.”
“……!”
“이제 그녀 곁으로 가서 사죄해.”
“……으!”
“당신이 얼마나 추악한 인간인지, 직접 하늘에 가서 용서를 빌어.”
이번에는 루시안이 품 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테아노는 눈을 크게 뜨고 발버둥 치려 했으나 여전히 눈동자 말고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
이미 몸의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렇게 죽는구나.
두려움은 마치 응어리처럼 뭉쳐져선 눈가로 몰려들었다.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굳어버린 얼굴 근육 위로 무기력한 눈물만 흘려보냈다.
“잘 가, 아버지.”
루시안은 테아노의 이마에 권총을 대었다.
차가운 금속이 이마에 닿는다. 이것이 나의 끝이고, 곧 세상이 까맣게 변하리라 생각한 찰나였다.
“탕!”
루시안이 입으로 총소리를 흉내 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한참 동안을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급기야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닦아냈다.
“아, 미안해.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놀리고 싶네. 당신이 준 고통이 얼마인데 이렇게 쉽게 죽일 수야 없지.”
“…….”
“그냥 그렇게 살아.”
“……으.”
“평생 침대에 누워서 사죄하는 거야. 어때, 그게 낫겠지?”
루시안은 그렇게 말하더니 품 안에서 약봉지를 꺼냈다.
그는 자연스레 앞에서 봉투를 가르더니 안에 있는 것을 집어선 테아노 앞에 조금씩 떨어뜨렸다.
“환자명 테아노 마이어, 직업은 의사. 로튼의 영주이자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마이어 가의 후작. 현재 상태, 과다한 마약류 복용에 의한 심각한 부작용. 예후가 좋지 않으리라고 예상됨.”
테아노는 눈동자만 굴려선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루시안은 테아노의 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증상은 무기한 전신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