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마우드는 테아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내의 눈을 가렸다.
“어어…….”
테아노는 눈을 가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손으로 내리려 했다.
그러자 마우드는 잽싸게 테아노를 끌어안으며 보드랍고 풍만한 것을 손에 쥐게 했다.
“왜 그래요, 재미없게.”
테아노가 얌전해지자 마우드는 또다시 그의 입 안에 약을 넣었다.
가슴을 만지게 하자 테아노는 반항하지 않고 그녀가 주는 대로 얌전히 약을 받아먹었다.
“너무, 많은 거 아냐?”
이 짧은 말을 하는 데에도 제법 숨이 찼다.
“아뇨, 부작용 없기로 유명해.”
“으음.”
먹을수록 혀끝은 무뎌지고 손끝의 감각은 예민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으음.”
테아노는 제 손에 닿은 보들보들한 것을 주물럭거리며 나른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근래 여인을 품지 못했던 터라 이미 온몸은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후우, 이제.”
제 목소리조차 물속에서 말하는 듯 왕왕 울렸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마우드의 허리를 쥐고 그대로 돌려세우려 했을 때였다.
어쩐지 손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처럼 나른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무, 물… 물을.”
몹시 목이 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약이 과하게 들어간 것 같다. 물을 마셔서 빨리 중화를 하든 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을 벌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무…….”
“후작님, 목마르세요?”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자꾸만 몸이 나른히 퍼졌다.
그래도 마우드가 눈치 빠르게 제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을 때였다.
“뭐야, 한참 재미있어지려는데 흥 깨네.”
마우드가 풀어 헤쳐진 앞섶을 모으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멍한 표정의 테아노를 향해 눈을 한 번 찡긋거렸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그러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후.”
테아노는 다시 소파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몸이 가벼워지더니 공중에 붕 뜬 것만 같았다.
마치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듯, 제 몸이 더운 공기로 가득 차 공중으로 날아가는 듯했다.
‘좋은데.’
마우드가 들어오고 약 기운이 조금 가시면, 이 금지된 약초의 이름을 제대로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마구잡이로 먹었지만 적당히 용량만 지킨다면 꽤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좋아… 지속 시간도 마음에 들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른한 감각에 젖어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좀 과했다. 마구잡이로 먹는 게 아니었는데.
빨리 이 갈증을 지우고 마우드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좋아 보이시네요.”
기대했던 목소리 대신, 서늘하고 낮은 사내의 음성이 되돌아왔다.
테아노가 눈을 뜨자 루시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그는 서둘러 바지춤을 올리려 했다. 조금 전 마우드가 풀어헤쳐 놓아 엉망이 된 아랫도리를 추스르려 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손에 힘이 실리지 않았던 것이다.
“흉측하네.”
루시안이 고개를 돌리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테아노는 입만 오물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했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라니까.”
“…….”
“그래도 지금은 닥치고 있으니 조금 낫군.”
루시안은 테아노의 책상에 걸터앉더니 조소를 흘렸다. 그는 마치 테아노를 조롱이라도 하듯 손까지 흔들었다.
테아노는 루시안의 언행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워낙 교활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는 생각해왔지만, 지금처럼 무례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럴 때 허심탄회한 이야기는 할 수 있겠네. 그렇죠?”
그러더니 책상 위에 있던 사과를 한 알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허공으로 툭, 툭 던졌다가 도로 받으며 말을 이었다.
“에몬 질이 없으니 여러모로 골치 아프죠?”
“…….”
생각지도 못한 이름의 등장에 테아노가 얼굴을 한 번 씰룩거렸다.
에몬?
갑자기 에몬 얘기는 왜 꺼내는 거지?
루시안과 에몬은 마주한 적도 없는 사이였다.
테아노는 간신히 고개를 틀어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녀석의 음산한 표정을 마주한 순간, 그는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젠장, 마우드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지금 마우드가 들어오면, 민망하긴 해도 저 꼴사나운 녀석을 내보낼 수 있을 텐데.
‘이런 꼴까지 보인 마당에 민망할 것도 없지.’
약 기운에서 벗어나면 절대 오늘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테아노가 경멸 어린 눈으로 루시안을 보고 있을 때였다.
“에몬 질이 있어야 나를 처리할 텐데.”
“…….”
“그자라면, 아버지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고 완벽하게 나를 제거했을 텐데 말이에요.”
루시안의 말에 테아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녀석,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 속내를 전부 알고 있는 것도, 지금 어떤 반응을 할 수 없는 것도 난감했다.
이런 추잡한 꼴로 앉아 녀석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어야 한다니.
그래도 마우드를 처리하고 사라진다고 했으니 조금만, 조금만 저 꼴을 보아주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을 때였다.
“내가 죽였어요.”
지나가는 말처럼, 가벼운 음조로 루시안이 말했다. 그러더니 테아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다.
“사람 되게 쉽게 죽더라고. 겨우 한 발이었는데.”
루시안은 엄지와 검지를 뻗어 총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제 관자놀이에 대었다.
“탕-”
마치 저를 겨냥한 것만 같아 테아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뒤늦게 밀려든 수치심에 눈을 뜨자 루시안은 고개를 젖히며 웃고 있었다.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으나, 현실은 목구멍이 꽉 막혀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그가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자 루시안이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아, 미안해요. 두 사람 각별한 사이였는데 내가 너무 그냥 죽였어. 마지막 말이라도 좀 들어볼 걸 그랬네. 미안해요, 총을 들고 있을 땐 내가 좀 마음이 급해지거든.”
루시안은 들고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더니 우물거렸다.
“내가 사격 솜씨가 좀 좋아요. 한번 볼래요?”
그는 갑자기 먹던 사과를 내려놓고는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
순간 테아노의 눈이 공포로 질렸다.
그는 핏발이 설만큼 눈을 크게 뜨고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설마 당신을 총으로 쏘기라도 할까 봐?”
“……으.”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쥐어짜자 간신히 신음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여기서 총을 쏘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 텐데… 그럴 수야 없지.”
루시안은 히죽거리더니 다시 품 안에 총을 집어넣었다.
‘마우드, 이 년은 대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테아노가 부들부들 떨며 마우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곧 진한 향수 냄새가 퍼졌다.
쟁반에 물과 컵을 받쳐 들고 온 마우드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는 반색했지만, 루시안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테아노는 숨을 헐떡이는 것으로 제 다급함을 표현했다.
“어머, 아드님이 와 계셨네.”
마우드는 서둘러 테아노에게 걸어가 벌어진 바지춤을 정돈해주었다.
“세상에, 후작님께서 부끄러운 꼴을 보였군요. 그렇게 보고만 있었어요? 아드님 매너가 영 빵점이네.”
루시안이 두 팔을 벌리고 헛웃음을 한 번 내뱉는 사이, 마우드가 잔에 물을 채워서는 테아노의 입가에 가져갔다.
“어서 드세요. 목마르셨죠?”
테아노는 가까스로 입을 벌려 잔에 입술을 대었다.
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다.
사실 마우드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루시안이 제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지 잔뜩 겁을 먹었다.
지금은 마우드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물을 넘긴다. 이제 물도 마셨으니 약 기운에서 조금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루시안이 갑자기 피실피실 거리더니 급기야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려다.
마우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뭐예요, 갑자기?”
“아, 너무 재미있어서.”
“당신 아버지가 약에 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
“이제 물도 마셨으니 조금 있으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을 저 사내가 너무 가엾고도 우스워서.”
“하여튼 못됐어.”
마우드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후작님, 그거 알아요? 당신 아들은 악마야.”
그러더니 테아노의 한쪽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런데 미안, 난 악마를 돕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