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똑똑.
마우드는 머리를 두어 번 매만지고는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테아노는 거대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추고 있었다.
그는 마우드가 찻잔을 받쳐 들고 들어오는 걸 곁눈으로 확인했다. 평소처럼 외면하려 했으나, 루시안이 남긴 말이 불쑥 떠올랐다.
‘렉토르 양에게 너무 곁을 주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뭐?’
‘생각해 보세요. 아이를 가졌다고 찾아와 저택뿐 아니라, 온 시내를 떠들썩하게 한 여인입니다. 그녀를 쉽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
‘그러니 제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최대한 그녀에게 다정하게 구세요.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경계를 풀 수 있도록.’
‘허.’
‘이게 정말 가구를 들어다 멀리 치우는 일이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뒤탈이 없으려면 조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키지 않았으나 루시안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빌어먹을.’
제 취향은 아니었으나 그녀 역시 제법 빼어난 미인이긴 했다.
흰 피부에 끝이 뾰족하리만치 오뚝한 코, 웃을 때마다 휘어지는 갈매기 눈썹과 묘하게 벌어지는 입술.
‘그래, 그 녀석 말이 맞아. 의심을 풀고 마음을 열게 해야 처리하기 쉽겠지.’
테아노는 살피던 장부를 천천히 덮고 마우드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오래 일하시는 것 같아 간식을 좀 챙겨드리려고요.”
마우드는 곰살맞게 웃으며 테아노의 책상 위에 가져온 차와 과일을 내려놓았다.
“고맙군.”
“별말씀을요.”
그런 뒤 마우드가 나가려 하자, 테아노는 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떼더니 손을 뻗었다.
“잠깐.”
돌아서 있던 마우드는 한쪽 눈썹을 씰룩거렸다.
모든 것이 루시안이 예고한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자, 그는 어딘가 어색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여기 잠깐 앉지.”
“그래도 되나요?”
마우드는 두 손을 모으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책상 맞은편에 놓인 거대한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마실 것도 가져오는 건데요.”
마우드가 아쉬운 목소리를 내자 테아노는 곧장 하녀를 불렀다. 하녀가 새로운 다과를 준비해오는 사이, 마우드는 목을 길게 빼고 테아노의 집무실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테아노는 그녀가 앉아있는 걸 지켜보는 게 어딘가 착잡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후작님, 제 바람이 있다면요.”
마우드가 접시 위에 놓인 쿠키를 하나 집어 들더니 입 안에 쏙 넣으며 말했다.
“아이가 부디 후작님을 쏙 빼닮았으면 하는 거예요.”
“쿨럭, 쿨럭!”
“어머, 후작님. 괜찮으세요?”
그는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손을 내저었다.
물론 아이를 가졌다는 여인을 죽이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제가 자초한 일이야.’
테아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천천히 마우드의 앞에 앉아서는 말문을 열었다.
“…사실 요 며칠 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
루시안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갈 것을 주문했지만, 그런 건 자신도 없을뿐더러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이요?”
“그러니까… 그대가 내 집에 들어온 일,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
“아-”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지만, 전부 신의 뜻이겠지.”
테아노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더니 마우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퍽 감동하였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후작님은 정말 따뜻하고 멋진 분이세요. 사람들도 전부 그리 말하더라고요.”
마우드는 일부러 사람들의 평판을 붙여넣었다. 루시안에게 들어 그가 제 이름에 붙어 있는 수식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은데, 때로는 그 틀이 너무 답답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으세요?”
마우드가 은근한 말을 던졌다.
“…틀?”
“네, 위대한 석학이니 대단한 학자니 하는 것들이요.”
“글쎄.”
“내가 후작님 정도의 사내였다면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하고 살았을 텐데.”
“…….”
“술이든, 여자든… 약이든.”
마우드의 말에 테아노는 저도 모르게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물론 테아노도 그리하고 싶었다.
미치도록 원했다.
그는 남다른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실현해줄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 그래. 그렇긴 하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그날 밤 혹시 생각나요?”
마우드가 눈을 애살스럽게 접으며 웃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엘던에서 보냈던 묘한 하룻밤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를 한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았던 그 밤.
저 뾰족한 코가 얼마나 뜨거운 호흡을 내뱉는지 알아차렸던 그 밤을 말이다.
비싼 티티에를 잔뜩 먹은 걸 후회했지만, 이제는 티티에 따위는 한 수레를 사도 될 만큼 돈이 많지 않은가.
근래 복잡한 일이 많았던 탓에 여자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그리고 테아노의 변화를 마우드는 놓치지 않았다.
“후작님, 제가 뭘 가져왔게요.”
“?”
“짠!”
마우드는 소매 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게 뭐지?”
“우리 후작님께서 좋아하시는 거.”
뭔지 명확히 말하지 않았으나 그건 분명-
“…어디서 났지?”
“조금씩 모아둔 거예요. 물론 저는… 우리 아이 때문에 먹을 수 없지만, 후작님을 기분 좋게 해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서.”
그러더니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런 뒤 교태로운 몸짓으로 테아노의 옆에 앉았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걸 해드리죠.”
마우드는 봉투 안에서 말린 잎을 꺼내더니 엄지와 검지 사이에 두고 비볐다.
느릿한 동작이 여러 번 이어지자 금세 야릇한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하…….”
테아노는 소파에 몸을 완전히 묻었다. 그러자 마우드는 손에 남은 것을 테아노의 입술 사이에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어때요?”
“후-”
테아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우 흐르는 신음만 내보낼 뿐이었다.
“어때요? 우리가 지난번 먹었던 것보다 훨씬 좋죠?”
“어디서 났지?”
“후작님께 드리고 싶어서 어렵게 구했어요.”
“후…….”
마우드는 봉투에 든 것을 탈탈 털어서는 완전히 가루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걸 살피며 천천히 입 안에 넣어주었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처럼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효과가 좋은데.”
분명 티티에와 맛과 향이 비슷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이건 비밀인데, 로튼에선 금지된 약이래요.”
“뭐……?”
금지된 약이라는 말에 테아노가 설핏 눈을 떴다.
하지만 마음만 그럴 뿐 눈꺼풀이 무거워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티티에보다 훨씬 강력해서 그렇대요. 저 산맥 너머 추운 지역에서만 거래가 가능하다던 걸요. 저도 처음 알았어요.”
“후… 확실히 다르군. 몸이 아주 뜨겁고 나른해.”
“하지만 더 좋은 게 남았는데. 벌써 가면 안 돼요.”
마우드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테아노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마우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 틈엔가 바닥에 앉아 테아노의 무릎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먹은 것 같은데.
신비롭고 오묘한 기운이 전신에 나른히 퍼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라니.’
테아노는 세상의 모든 향기에 취해버린 것만 같았다. 아련한 맛이 혀를 감싸 안았다가 폭발하듯 우아하게 터진다.
거기다 무릎 아래에 꿇어앉은 마우드가 테아노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고 괴롭히고 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그녀는 사내를 홀리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오, 맙소사…….”
“조금 더 드시겠어요?”
“으응, 아니… 괜찮아.”
하지만 금지된 약초라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다.
“어차피 우리 둘뿐인걸요.”
“…아냐.”
테아노가 눈을 감은 채 나른히 대답했다. 약의 효과는 대단했고 사실 조금 더 먹고 싶었으나 공연히 불법을 저질렀다가 뒤탈이 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고개를 뒤로 빼고 신음을 흘릴 때였다.
“읍…….”
갑자기 마우드가 테아노의 벌어진 입속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뭐라 할 겨를도 없이 약초는 야릇한 향기만 남긴 채 스며들었다.
테아노는 마우드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이내 그런 마음마저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