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자, 차를 좀 드세요.”
엘자가 적기에 차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침대 발치에 있던 테이블을 끌어오더니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르휜 양의 입맛에 맞으면 좋겠군요. 아버지께서 저 머나먼 에른베르크까지 가서 구해오신 차랍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은 하나뿐이었다.
라비엘리는 고맙다고 대답했지만 차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그러자 니엘이 풋, 하고 웃더니 엘자에게 손짓했다.
“엘자, 이건 치우고 주전자째로 가져와. 그리고 여기서 찻잎을 우리도록 해. 내 잔도 가져오고.”
“예?”
엘자가 의아한 눈을 하자 니엘이 눈을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우리가 르휜 양의 차에 약을 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하거든.”
니엘의 말에 라비엘리는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하지만 별말 없이 고개만 한 번 숙였다 들 뿐, 굳이 새로운 차를 가져오는 걸 말리지는 않았다.
다시 새로운 차가 나오는 사이, 니엘이 말문을 열었다.
“르휜 양, 루시안을 얼마나 믿어요?”
이제 그가 저를 부른 용건을 꺼내겠다는 생각에 라비엘리는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루시안이 제 앞에서 보여준 모습만큼은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믿는다는 건가요?”
“네.”
“진심이라.”
니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라비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르휜 양께선 내 가족사에 딱히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우리가 대화를 계속하려면 어쩔 수 없이 꺼내야겠네요.”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입매를 부드럽게 풀었다.
“어머니는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지금의 아버지와 재혼했어요.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 그 사실을 알려주셨죠. 나는 그제야 어머니를 평생 괴롭힌 심각한 우울증의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이니까.”
그러더니 말을 계속하는 게 힘겨운지 잠시 베개에 머리를 깊숙하게 묻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그 남자를 잊지 못했어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평생을 증오로 살더니, 결국 스스로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왜 그토록 아버지를 미워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 전 헤어진 사내를… 왜 그렇게까지 저주하는지 말입니다.”
니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느리게 눈을 감자 그의 얼굴이 처음보다 창백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괜찮으세요? 엘자를 불러올까요?”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필요하면 내가 부를게요.”
라비엘리는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르휜 양, 보는 앞에서 만들었으니 이제 차를 한 번 먹어봐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찻잔을 들었다. 거듭 권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싶을 만큼 풍미가 훌륭한 차였다.
“적당히 식었습니까?”
“네.”
무심코 대답한 라비엘리는 니엘이 왜 그렇게 물었는지를 곧 깨달았다.
“미안하지만 내가 차를 마실 수 있게 도와줄래요?”
“네, 물론이에요.”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집에 와서 나와 대화하려면 필수로 해야 하는 일이랍니다.”
니엘은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다가가 니엘의 입에 찻잔을 대주었다.
그러고는 그가 마시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찻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조금 더 드시겠어요?”
“아뇨, 괜찮아요.”
“언제든 말해주세요.”
“그럴게요.”
차를 마시며 분위기가 조금 풀렸지만 여전히 대화는 무거운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니엘은 다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내키지 않는 듯 한동안 멍한 표정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말했지만, 그 역시 어머니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그 남자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어질 말을 몹시 힘겹게 꺼냈다.
“그는 실험할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뭐라고요?”
“제 연구를 실험해 볼 인간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태아를 벤 여인의 육체가 필요했어요. 갓난아기는 아버지가 주는 약을 먹고 그의 실험체가 되었습니다. 물론 내 기억에는 없어요.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선명히 남아… 그녀를 영원히 괴롭혔지만.”
니엘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라비엘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설마.”
“어머니는 내가 지금처럼 온몸이 굳어지기 시작하자, 전부 본인의 탓이라 자책하셨어요. 그때 아버지를 말리지 못한 걸 후회하고 또 후회하셨죠. 내 병의 원인은 아무도 모릅니다. 임신 중이던 어머니에게 약을 먹이고, 갓난쟁이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죠. 인과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남자가 우리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사실이에요.”
라비엘리의 가슴이 불쾌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혹시나 하는 생각 한 줄기가 피어난다.
“…….”
불행한 사건에 짓눌려 차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니엘은 조금 전보다 메마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사내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대단한 학자인 척, 고고한 사람인 척하는 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죽이고 싶지는 않았어요.”
죽이다니.
단번에 죽이고 싶지 않다니.
라비엘리는 눈앞의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뭐라고요?”
“그 역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때를 기다렸어요. 단순한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
“하지만… 곁에 아무도 없더군요. 그래서 자객이라도 써서 그의 머리에 구멍을 내려 했지요. 르휜 가의 여인과 한집에 산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라비엘리는 더는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일어섰다.
니엘은 그녀가 움직이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 당신.”
“그래요, 그 사내가 바로 테아노 마이어죠. 내가 그 남자의 아들입니다.”
라비엘리는 황망한 얼굴로 니엘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테아노 마이어의 아들이면 루시안은.”
“당신에게 유감은 없어요. 나도 루시안도.”
니엘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한 탓인지 얼굴이 창백했지만 두 눈만큼은 처음보다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르휜 양, 이쯤에서 밝히는 게 좋겠군요.”
“…….”
“태어날 때 어머니께서 주신 내 이름은 니엘 마이어예요.”
그는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내 형제 루시안은 날 대신해서 테아노를 무너뜨리고 당신을 죽이러 로튼에 간 겁니다.”
그들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뒤로 물러난 라비엘리는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니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군요.”
점점 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라비엘리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라비엘리가 묻자 니엘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후작을 용서하려는 것도 아닐 텐데, 내게 알려주는 의도가 뭐예요?”
그녀는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글쎄요, 왜일까.”
니엘은 머리를 베개에 조금 더 묻더니 나른히 말을 이었다.
“내 친구가 완벽하게 복수한 뒤에 내게 돌아오길 바라서.”
“…….”
“미안하지만 내 삶의 목적은 그것뿐이에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누워있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라!”
니엘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더 끔찍한 고통을 원해. 그를 죽여버리는 것만으로는, 절대……, 절대 이런 고통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 그를 죽여선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급기야 니엘이 흰 거품을 뱉어내더니 두 눈마저 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놀란 라비엘리가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니엘의 비명을 들은 엘자가 뛰어 들어왔다.
“주인님, 주인님!”
엘자는 니엘을 도로 눕히고는 그의 고개를 돌렸다.
“아악, 악!”
하지만 그는 울부짖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하인들이 니엘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엘자는 고개를 돌려 라비엘리에게 소리쳤다.
“르휜 양, 어서 가요. 어서요!”
뒷걸음질 치던 라비엘리는 이내 가방을 쥐고 밖으로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니엘의 고성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