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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20)화 (120/136)

120화

라비엘리를 내려준 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내 사라졌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떠 있었지만 그리 덥지 않았다. 낯선 이의 집에 방문하기에 적당한 시간과 날씨였다.

“휴.”

마음의 준비는 마차 안에서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택 앞에 도착하자 입은 커녕 발걸음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갈까.

모른 척 살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그의 비밀을 덮고, 그는 영원히 침묵하면 되지 않을까.

루시안과 함께했던 밤의 기억이 라비엘리를 검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라비엘리, 후회할 일 하지 말아요.’

여기서 돌아간다면, 그날 느꼈던 온기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루시안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날의 추억마저 엉망이 될지 모른다.

라비엘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냐, 엉망이 된다고 하더라도 진실은 알아야 해.

‘그래. 모른 척 덮고 살 수는 없어.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라비엘리는 가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전쟁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다부진 얼굴로 저택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을 때였다.

호흡을 고를 새도 없이 풋맨이 문을 열었다. 라비엘리는 어색하게 입매를 당기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풋맨은 경계심이 묻은 눈으로 라비엘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니엘 페른 씨의 저택…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어떻게 오셨지요?”

잠시 후 말끔한 차림의 신사가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저는 로튼에서 온 라비엘리 르휜이라고 합니다. 니엘 페른 씨를 만나러 왔어요.”

라비엘리는 니엘에게서 받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집사는 겉면에 적힌 필적을 이리저리 확인하더니 다소 뚝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들어오시죠, 르휜 양.”

그를 따라 들어간 저택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모를 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마이어 가의 저택이 고풍스럽고 점잖은 분위기라면 이곳은 각지에서 희귀하고 빛나는 것은 전부 모아온 것처럼 보였다.

저택 주인의 취향을 확인하며 한동안 집사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집사가 문을 두드리자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 다소곳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엘자, 주인님께 손님이 오셨다고 전해.”

“누구라고 말씀 올릴까요?”

“로튼에서 오신 라비엘리 르휜 양이라고 말씀드려.”

라비엘리의 이름을 듣자 엘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정돈하고는 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엘자가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르휜 양,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라비엘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노부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니엘 페른은 목 아래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그를 만나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하게 될까.

그녀를 따라 얼마간 걸어갔을 때였다.

돌연 엘자가 복도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돌아서서 라비엘리를 마주 보았다.

“르휜 양.”

라비엘리는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노부인을 마주했다.

“네, 부인.”

엘자는 입술을 두어 번 씰룩이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주인님께선 몸이 불편해 가끔 아주 예민하게 돌변할 때가 있어요. 친한 친구든, 손님이든 상관없이요.”

“네, 그런 걸 염려하셨다면 전 괜찮아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네.”

“르휜 양께서 받은 편지는 제가 적었어요.”

“아.”

라비엘리는 지금부터가 노부인의 용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주인님께서 펜을 쥐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어서요.”

“네, 그러셨군요.”

“그래서 주인님께서 처한 상황도, 그분이 당신을 왜 불렀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엘자의 말에 라비엘리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가방을 움켜쥔 손에 땀이 베기 시작했다.

“모른 척해야 한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이렇게 나서는 게 누구를 위한 일인지도 사실 모르겠어요.”

엘자는 불안한지 얼굴을 여러 번 매만졌다.

“저는 페른가의 사람이라 르휜 양에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

“루시안 도련님과 주인님은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더니 라비엘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엾고 안쓰러운 사람이에요.”

“네.”

“그것만 기억해주세요. 제가 르휜 양에게 드릴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그러더니 이내 몸을 돌려 니엘의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런 말씀을 왜 하신 거지.’

아직 니엘을 만나기 전이라, 라비엘리는 엘자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어 라비엘리가 안내받은 곳은 응접실이 아니었다.

‘움직일 수 없으니…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 필요 없었겠구나.’

저택의 주인이 머물고 있는 방은 굉장히 독특한 구조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창문이었다.

한쪽 벽면이 완전히 뚫린 것처럼 느껴지는 창- 슬쩍 위를 살피자 언제든 볕을 차단할 수 있게 천으로 유리를 완전히 가린 창문이 이중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 아래 놓인 침대와 양쪽에 가득 쌓인 수건과 물건들. 마치 형을 집행할 때 쓰는 것처럼 보이는 원목 의자와 방 안에 은근히 퍼지는 알코올 냄새까지.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엘자.”

라비엘리가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멀리 보이는 침대에서 맥없는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주인님.”

“이제 가까이 와서 손님 접대를 도와주겠어?”

“물론이지요.”

엘자는 능숙하게 니엘의 목덜미에 손을 받쳤다. 그런 다음 단단한 베개를 등에 대고 부목을 베개 뒤에 밀더니, 딸깍- 소리 나게 앞으로 접었다.

니엘의 몸이 고꾸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인 것 같았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허리를 조금 더 세우면 좋겠군.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셨으니 말이야.”

엘자는 천천히 베개 위치를 조정했다.

“이제 어떠세요?”

“좋아, 이제 준비를 마쳤으니 르휜 양을 이쪽으로 모셔와.”

“네, 모셔온 뒤에는 차를 내올게요.”

“그래.”

엘자는 밖으로 나가기 전 라비엘리를 한번 힐긋거렸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르휜 양, 여기 앉으셔요.”

“고맙습니다.”

라비엘리는 침대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레 앉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페른 씨. 라비엘리 르휜이에요.”

늘 침대 위에서만 있어서인지 아니면 본래 피부가 창백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에도 입술에도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반가워요, 르휜 양.”

니엘은 흐릿한 미소를 보이더니 라비엘리를 빤히 보았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라비엘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로튼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요?”

“네.”

“멀리까지 와주어 고마워요.”

“괜찮아요.”

“온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준비를 제대로 했을 텐데.”

니엘을 만나면 무슨 대화를 하게 될 것인지, 어떤 표정으로 마주할 것인지를 몹시 염려했다.

라비엘리의 상상 속에서 니엘 페른은 예민하고 괴벽하며 어딘가 오만한 사내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를 실제로 마주하자 제 상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이내 깨달았다.

니엘은 정중하고 신사적인 사내라고 생각하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참, 르휜 양은 루시안과 친구인가요?”

라비엘리는 그의 질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루시안과 친구라기엔 미묘했고, 연인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복잡한 관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네.”

“그럼 편하게 니엘이라고 불러요. 그 녀석의 친구라면 내게도 친구니까.”

이번에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라면서 왜 그런 식으로 편지를 보냈을까.’

니엘은 저를 찾아오기 전까지 부디 안전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마치 루시안 마이어가 위험한 사람인 것처럼 적지 않았던가.

“당신을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삶이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군요.”

니엘은 교교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루시안이 내 이야기를 한 적 있나요?”

“네, 두 분이 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하셨다고.”

“맞아요. 그 녀석은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두 분… 똑같이 반대로 말씀하시네요.”

라비엘리의 말에 니엘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뭐라고요? 설마 그 녀석이 내가 대단하다고 했습니까?”

“네, 촉망받는 인재에 본인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실력자라고요.”

“엉뚱하기는.”

니엘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슬쩍 내렸다 들었다.

“르휜 양, 루시안과 나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지만… 사람들은 전부 우리가 형제인 줄 알았답니다.”

그는 회상에 잠긴 눈이 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는 늘 함께였지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셨군요.”

“네, 맞아요. 어린 시절부터 내내 내 곁을 지켜주었지요.”

라비엘리가 잠시 어린 시절의 루시안을 그려보는 사이, 니엘이 메마른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 녀석은 내 어머니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도, 내게 헌신적이던 아버지가… 사실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내가 온몸이 굳어간다는 걸 알았을 때도, 결국 이렇게 산송장이 되어버렸을 때도 곁에 있었거든요.”

라비엘리는 무겁게 내려앉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부모님의 일도 페른 씨에게 닥친 불행한 일도 전부 유감이에요.”

“괜찮아요. 사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평화로울 수 있다면.”

니엘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라비엘리는 멈칫하였다.

오래전 루시안이 제 어머니의 불행을 이야기하며 덧붙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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