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친애하는 언니에게.
이온에 온 지도 꽤 여러 날이 흘렀어.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평화로워.
다만 엘리 언니, 언니와 긴히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 중요하고 급한 일이니 언니 혼자 와주었으면 해.
마차를 보냈으니 서둘러 줘.
언니를 기다리며 레브리안 르휜.’
루시안은 집어 들었던 편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방 안은 텅 비어있었고 로제만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차가 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대체 언제 가신 걸까요?”
로제가 울적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루시안은 방 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침구, 흠뻑 젖은 화분의 겉흙과 신선한 공기. 이른 아침 일어나 환기까지 시키고 나간 모양이었다.
“아무리 마차가 왔다고 해도 혼자 그 먼 곳을 어찌 가시려고. 절 깨우시지도 않고.”
로제 등 뒤에 서 있던 메이지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루시안은 별말 없이 창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어떤 표정일지 궁금했는데 아쉽게 됐네.
“다른 곳도 아니고 동생에게 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죠.”
“여기 오신 이후로 내내 동생분의 편지를 기다리긴 하셨어요. 그곳에서 자리를 잡으시고 안정되려면 못해도 한 달 정도는 걸리겠구나 했는데.”
로제는 라비엘리가 혼자 간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거렸다.
“아가씨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한 분인데. 가다가 힘들어도 마부에게 말이나 제대로 하실지 모르겠어요.”
루시안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내뱉을 뻔하였다.
말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니.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간밤에 제게 키스한 라비엘리를 생각했다.
사실 정원을 함께 걷는 내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그녀의 숨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서였다.
내게서 도망치라 말하고 싶으면서도 도저히 멀어질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저를 향한 경계심을 발견하면, 그나마 죄책감이 덜했다.
하지만 간밤의 라비엘리는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순진하고 말간 얼굴을 했다.
그녀와의 키스를 잊을 수 있을까.
루시안은 아직 입술에 남은 잔인하고도 뜨거운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후작님께는 말씀드려야겠지요?”
그때, 메이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루시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짤막이 대답했다.
“내가 하죠.”
루시안은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 라비엘리의 필적은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메모를 남기지 않고… 굳이 레브리안의 편지를 두고 간 이유가 뭘까.’
마치 본인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듯한 행동.
레브리안이 나를 찾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려는 듯한 모습.
짧게라도 라비엘리가 직접 편지를 남기는 대신, 편지를 두고 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메이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돌아섰을 때였다.
“어머, 왜 다들 여기 모여있어요?”
복도를 지나가던 마우드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르휜 양이 어딜 가셨나 보네.”
그녀가 등장하자 로제는 얼굴을 한 번 매만지더니 루시안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내려가 볼게요.”
메이지와 로제가 밖으로 나가자 마우드는 커다란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그녀는 복도를 빠르게 걸어 나가는 여인들을 한동안 지켜보다 볼멘소리를 냈다.
“참 나, 방금 봤죠?”
마우드는 허리를 세우고는 루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은근슬쩍 라비엘리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볼품없는 가구와 내부를 확인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휴, 내가 서러워서 이 집에서 살겠나. 나만 보면 뭐 씹은 얼굴로 자리를 피하니 원.”
마우드를 지나쳐 나가려던 루시안이 문 앞에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는 마우드를 돌아보지 않고 나른히 목소리만 내었다.
“나름 잘나가는 오페라 가수라고 하지 않았나. 왜 여기서 천덕꾸러기를 자처하고 있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마우드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천덕꾸러기라니, 내가 어딜 봐서 천덕꾸러기예요?”
그러더니 이어질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으르렁거렸다.
“이봐요, 루시안.”
루시안은 여전히 돌아선 채 마우드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나 당신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마우드는 루시안의 등 뒤에 바짝 붙더니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뭐, 다들 쉬쉬하는 것 같으니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을게요.”
“뭘 말입니까?”
“왜 이래요, 알면서.”
“글쎄,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루시안이 웃으며 돌아섰다.
지금처럼 가까이에서 그를 마주한 적이 없는 탓에 마우드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세상에, 어쩜 이렇게 잘생겼지?’
새삼 루시안의 화려한 외모에 감탄하였다.
그녀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다시 도도하게 고개를 들었다.
“뭘 말하는지 모르면 내가 알려드릴까?”
“당신이 거짓말쟁이라는 거?”
갑작스러운 말에 마우드는 당황했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쟁이라니요. 나는 당신 얘기를 하고 있는 건데.”
“내가 후작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가 태연히 말하자 마우드는 입술이 보이지 않게 안으로 붙였다.
곤란해하는 얼굴이 귀여울 것 같았는데, 루시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딘가 능구렁이 같으면서도 뻣뻣하단 말이야. 알 수가 없네.’
마우드는 저보다 남자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여인의 교태에 넘어가지 않는 사내는 흔치 않다.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내들이란 겉으로는 위엄있는 척, 중심이 있는 척해도 결국에는 다 똑같았다.
눈앞에 서 있는 미남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물론 테아노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이 집안에 들어와 있으니, 루시안에게 접근할 기회도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라비엘리가 떠나고 텅 빈 방에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 몹시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오늘,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요. 뭐, 여긴 우리뿐이니 상관없지.”
마우드는 목소리 끝을 늘이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탐이 나던 사내다.
“여기 온 지 꽤 됐는데, 우리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 해봤잖아요.”
그녀는 루시안의 등을 감상하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냈다.
보는 것만으로도 보드라운 감각이 느껴지는 갈색 머리. 마우드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한집에 사는데 이렇게 뻣뻣하게 굴 필요 있나 싶은데.”
거기까지 말한 마우드가 손을 내밀어 루시안의 어깨 위에 올린 순간이었다.
루시안이 돌아서며 마우드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이런 취향이셨구나.”
그의 말에 마우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취향?”
“값싸고 저급한.”
“방금 한 말, 그리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데.”
“맞아요,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야.”
“뭐라고요?”
마우드가 신경질을 내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아, 그렇지 않아도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
“아버지의 일이라 참견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나름 정의로운 편이라서.”
“그게 무슨 말이죠?”
“아버지가 당신을 죽일 생각인가 봐.”
루시안은 이제 산책이나 가야겠다, 라는 식의 가벼운 톤으로 무서운 말을 꺼내 놓았다.
“뭐, 뭐라고요?”
“예상하지 않았어요? 뭘 그리 놀래요.”
“…….”
“설마 당신을 순순히 받아줄 거로 생각했습니까? 생각보다 순진하네.”
마우드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니 고개를 빠르게 젓기 시작했다.
“헛소리하지 마. 죽이다니, 누가 누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저런, 진정해요. 내가 죽인다는 것도 아닌데.”
루시안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지만 마우드는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 거짓말이지.”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지?”
“당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안주인으로 들어오는 게 못마땅한 거 아냐?”
“망상이 지나치네.”
루시안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못마땅했으면 가만히 있었겠지. 아버지가 없애면 그만이니까.”
“…….”
마우드는 루시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하는 말이 거짓일까, 진짜일까.
“믿든 믿지 않든 그건 당신 자유.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만 알아둬요.”
거기까지 말한 루시안이 돌아섰다. 가만히 문을 열고 입 모양으로 하나, 둘까지 말했을 때였다.
“잠깐만, 기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