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두 사람이 막 정원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저택 입구에서 들려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루시안이 라비엘리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지금 뭐 하는.”
“쉿.”
굳이 몸을 피할 필요까지는 있나 싶던 찰나, 여인의 앙칼진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나더러 도둑질을 하라는 거예요?”
로제였다.
“도둑질이라니. 빌리는 거라니까요.”
잔뜩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맞은편에 있는 건 분명 마우드였다.
날카롭게 얽히는 여인들의 음성에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다.
‘도둑질이라고?’
라비엘리는 루시안을 따라 숨을 죽이고 섰다. 바로 등 뒤에 선 루시안의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조금 앞으로 가고 싶은데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묘하게 그에게 밀착된 채 라비엘리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급하니까 잠깐 빌리자는 거예요. 잘 찾아보면 분명 값나가는 게 있을 거야. 몰래 가져다주면 내가 나중에 두 배, 아니 세 배로 돌려준다니까.”
“렉토르 양, 그게 도둑질이에요. 아시겠어요?”
“다시 돌려주는데 왜 도둑질이지?”
“그렇게 돈이 급하면 차라리 르휜 양에게 직접 말하면 되잖아요.”
“이미 말했어요. 그런데 없다잖아. 알아본다고는 하는데 괜히 하는 소리라고요. 르휜 양 같은 사람이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나 해봤겠어요?”
“없으니 없다고 하시겠지요.”
“진짜 순진하네. 르휜 가에서 살던 영애가 보석 하나 없다고? 말도 안 되지. 아무리 맨몸으로 쫓겨났다고 해도 무려 백작가의 영애였잖아요. 아마 숨겨둔 게 있을 거야.”
“렉토르 양.”
“제발 부탁이에요, 로제. 한 번만 봐줘요, 응? 그래도 자기랑은 가깝잖아.”
“렉토르 양, 미안해요. 이건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로제, 로제!”
로제가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마우드의 걸음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돈이 급한 마우드가 로제에게 라비엘리의 물건을 훔쳐 올 수 있는지 물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라비엘리는 어쩐지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마우드가 한 말이 상처를 툭툭 건드렸다.
지난 일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에는 관심 없다.
굳이 과거를 떠올려 우울감에 젖지 말자.
그런 생각으로 무장한 라비엘리가 앞으로 걸어 나가려는 찰나였다.
“엘리.”
등 뒤에서 루시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아요?”
기대하지 않은 위로였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쩐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서일까.
아니면, 마치 저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루시안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일까.
라비엘리가 그저 침묵하고 있을 때, 등 뒤에 있던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당신이 괜찮을 거라 믿을게요.”
“맞아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행이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우습죠.”
라비엘리는 여인들이 머물렀다 사라진 자리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내 존재를 숨기려 이름까지 속였는데.”
“로제 말입니까?”
라비엘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와 함께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물론 메이지도 그녀를 살뜰히 챙겼으나 마이어가에서 받은 호의는 어딘가 불편했다.
“사람 일이란 게 늘 그렇죠. 좋은 인연이라 생각했던 것이 뒤집히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필연이 되기도 하니까.”
머릿속에는 여전히 니엘이 남긴 말이 떠나지 않았고, 루시안을 향한 마음은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 당신은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불쑥 속내를 드러냈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루시안을 마주 보았다.
아주 가까이에 그가 있다.
얼마 전 어설프게나마 춤을 추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당신은 나와 어떤 인연이죠?”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나른한 미소를 기대했다.
그가 웃으며 장난스레 대답하면 이 무거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질 거라 짐작하며.
하지만 라비엘리가 바랐던 여유로운 웃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글쎄.”
“글쎄라니, 당신답지 않은 대답이네.”
“내게 당신과의 인연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어둠 속에 가려진 탓에 루시안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은데.
그런 생각 끝에 라비엘리가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그럼 악연인가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드디어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지금과 같은 침묵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고, 어떤 순간에서도 막힘이 없었으니까.
고작 인연이니 아니니 하는 말장난 같은 소리에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할까.
두려울 것 하나 없어 보이던 그에게 지금은 왜 어려운 걸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
“인연인지 악연인지 말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여기서 그만두고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한 도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가.”
“계속 내 질문에는 답을 피하네요. 당신답지 않게.”
“라비엘리, 후회할 일 하지 말아요.”
그러자 루시안이 부드럽게 웃더니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등을 두어 번 토닥이는 게 아닌가.
어쩐지 제 마음이 뭉개진 것만 같아 라비엘리는 불쑥 신경질이 났다. 그녀는 발끈해서 다시 돌아섰다.
“후회할 일이 뭔데요?”
“지금 이러는 거.”
“사람 궁지로 몰아넣고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거 당신만 할 줄 안다고 생각했나요? 그런데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곤란하고 당황스러워요?”
마이어 가로 돌아온 이후 라비엘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니엘 페른과 루시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남긴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고, 루시안이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라비엘리는 루시안은 결코 제게 해가 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제 불행을 멈추게 할 사람이라는 걸 믿고 싶었다.
편지 말미에 적혀있던, 부디 무사하라는 말이 내내 가슴에 남아 있었지만 아닐 거로 생각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 번 더 루시안의 입으로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말이 온전히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그런데도 루시안의 음성으로 무엇이든 듣고 싶었다.
“엘리, 다시 한번 말하지만.”
“…….”
“후회할 일 하지 말아요.”
루시안이 서늘하게 젖은 눈으로 말했다.
“그래요, 악연이라도 해두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니까.”
차디찬 음성을 떨군 라비엘리가 돌아섰을 때였다.
루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조금 전보다 어딘가 위태로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인연이 되겠지.”
루시안이 불쑥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적막하게 흐르던 공기조차 멈추었을 때, 라비엘리는 돌연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뇨, 내가 움직인 거예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라비엘리는 지금껏 꾹꾹 눌러 온 열망을 루시안에게 전하였다. 그녀가 발꿈치를 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되었다.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사내의 감정이 호흡에 실려 넘어 든다.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급하게 서로를 끌어안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이 빵 한 조각을 마주했을 때처럼.
격렬하게 부딪히는 와중에 라비엘리는 슬쩍 눈을 떠 루시안을 훔쳐보았다. 감은 두 눈에 정교하게 자리한 속눈썹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루시안의 호흡이, 그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심지어 꿈이 아니다.
라비엘리는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숨 냄새를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전부 다 먹어버리고 싶을 만큼.
낯선 자극이었다.
낯선 동시에, 지나온 시간을 깨우는 자극이기도 했다.
얼마간의 충동이 지난 후에 루시안이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경고했는데.”
“이게 내 경고예요.”
라비엘리가 루시안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등을 들어 올렸다. 루시안이 나른한 얼굴로 그녀를 바짝 껴안는다.
그의 입술은 차가웠고, 라비엘리는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