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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17)화 (117/136)

117화

테아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문가를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밤중이라 복도를 오가는 사용인들의 발걸음 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저 너머가 무척 신경 쓰였다.

‘설마 마우드를 처리하겠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테아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지?”

테아노는 루시안을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신뢰는커녕 당장에라도 집 밖으로 내쫓고 싶었다. 그는 교활한 모사꾼이다. 에몬이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죽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루시안이 무언가를 처리하겠다고 나선다면-

그건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았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루시안은 단번에 테아노가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떤 방법이 있느냔 말이다.”

조급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테아노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인도적인 방법과 비인도적이지만 확실한 방법. 쉽지만 뒤탈이 있을 수 있는 것과 어렵지만 완전히 끝내는 방법.”

“…….”

“비인도적인 방법이라면 혹시.”

테아노가 목소리를 낮춰 묻자 루시안은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무얼 제일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않는지도.”

테아노는 마우드가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지금도 이 집안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생각하자 구역감을 참기 어려웠다.

“그래, 좋아. 그런데… 왜 내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야 그 여자가 없으면 좋지만, 네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테아노는 돈이 이유일 거로 생각했다.

에몬이 마이어가에 무지막지한 재산을 남겼으니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든 거겠지.

그의 예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저는 아버지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거래?”

“네, 하지만 제가 바라는 건 아버지께서 원하는 것만큼 위험하고 어려운 건 아닙니다.”

“돈인가?”

루시안은 아름다운 입술을 옆으로 늘이며 대답했다.

“난 그저 당신의 아들로 인정받길 원해요. 그게 전부입니다.”

“…….”

“어때요, 생각보다 간단하죠?”

테아노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들로 인정해달라고?

지금 갑자기 나타나 제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 때문에 환장할 지경인데, 이 와중에 밖에서 다 커서 돌아온 아들이 있다는 걸 밝히라는 건가?

“그건 안 돼.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통에 밖에 나가는 것도 화가 나는데, 불난 집에 기름이라도 뿌리라는 건가?”

“저런, 전 그리 복잡한 사람이 아닙니다.”

“뭐?”

“공표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무도 몰라도 좋아요.”

“…….”

“그것 말고도 가족이 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테아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루시안이 건조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저 서류상으로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만 남겨주세요.”

“…….”

“그러면 이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가구를 치워드리고, 나도 영원히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테아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영원히 나타나지 않겠다고?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어차피 우린 피차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어머니를 버린 당신을 증오하고,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하니까.”

“…….”

“난 그런 사람과 남은 생을 함께 살며 인생을 낭비하긴 싫거든.”

“…….”

“그리고 저 여자를 보면 죽은 어머니가 생각나서 굉장히 불쾌하거든요. 마지막으로 이 괴로움을 지울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루시안은 의도적으로 미간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테아노 앞에서 처음으로 보인 표정이었다.

물론 철저하게 계산된 모습이었지만 테아노는 알지 못했다.

“흠.”

꽤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제 아래로 이름을 올리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으니, 제가 입을 다물고 루시안이 약속대로 사라진다면 깔끔했다.

문제는 이 녀석을 어디까지, 얼마나 믿어야 하는가에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 생각이지?”

“왜요, 놀러 오시려고요?”

루시안이 희미하게 웃자 테아노는 헛기침을 했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대신 실수 없이 처리해야 해.”

* * *

테아노의 방에서 나온 루시안은 저택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제법 선선했고 걷기에 딱 알맞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쓸데없이 고상하게 정원을 꾸며놨군, 이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앞마당 뜰에 라비엘리가 서 있었다.

“…….”

루시안은 그녀를 부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달빛 아래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언제쯤이면 이 아슬아슬한 평화가 깨질까.

그런 생각 끝에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데 라비엘리가 돌아보았다.

“안녕, 레이디.”

루시안의 음성이 라비엘리의 허리를 나른히 감아 돌려세웠다.

“안 자고 왜 나왔어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라비엘리가 대답했다.

“산책하려고요. 당신은요?”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오후에 렉토르 양과 이야기를 좀 했어요.”

라비엘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지금 당신 표정을 보니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나 본데.”

“당신에게도 흥미로울걸요.”

라비엘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게 돈을 빌려달라더군요.”

“돈?”

“네, 그것도 엄청나게 큰 액수를요.”

“어디에 쓰려고?”

“그건 모르겠어요.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자그마치 5000 크랜이나 빌려달라고 했어요.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걸까요?”

정원으로 나오기 전까지 라비엘리는 내내 마우드와의 대화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제 일이라 상상해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5000 크랜이 큰돈이긴 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정도의 집은 살 수 없는 돈이었고, 뜬금없이 마차를 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때, 루시안이 라비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여자, 아이를 갖지 않았네요.”

“뭐라고요?”

“혹시나 했는데 이걸로 확실해졌네.”

라비엘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작 돈을 빌려달라는 말로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쪽으로 걸읍시다.”

루시안은 라비엘리와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늦은 밤인데다 사람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몰라서였다.

“아마 그 돈은 산파에게 줄 돈일 겁니다.”

“산파요?”

라비엘리는 얼굴이 주름으로 가득한 노파의 얼굴을 떠올렸다.

“산파를 매수해 후작을 속인 거야. 후작의 아이를 가졌으니 재산의 절반은 제 것이라고 큰소리쳤겠지.”

“…….”

“큰소리는 쳤고 입을 막아야 하는데 당장 돈이 나올 구멍이 없으니 난감할 겁니다.”

“세상에.”

“생각보다 수완이 좋네.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카드예요.”

루시안이 킬킬 웃자 라비엘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설마 후작님께 말씀드릴 건가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은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돼. 이런 고급 정보를 흘려선 안 되지.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당신은 그저 마음 편히 있어요.”

라비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레브리안에게서 올 편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빨리 편지가 와서 루시안 몰래 힐스에 갈 생각뿐이었다.

“레브리안은 잘 있을지 걱정돼요.”

라비엘리는 은근히 레브리안의 이름을 흘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잘 지낼 겁니다.”

“신관님은 좋은 분이긴 하지만, 그 낯선 곳에서 어찌 지낼지.”

“지금은 처음이라 정신없겠지.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한 번 다녀와요.”

“후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

“세상에, 내가 있는데 그걸 걱정하는 겁니까?”

조심스레 루시안을 올려다보자,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뇨, 걱정하지 않아요.”

“좋아요. 그럼 이제 들어가죠.”

루시안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라비엘리는 호흡을 골랐다.

‘루시안, 나는 당신의 비밀을 꼭 알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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