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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16)화 (116/136)

116화

“르휜 양, 이 쿠키 좀 먹어봐요.”

마우드는 라비엘리 앞으로 접시를 밀며 살갑게 웃었다.

“네, 고마워요.”

라비엘리는 적당한 크기의 쿠키를 하나 집었다.

마우드의 호의가 영 어색하지만, 그녀는 루시안의 조언에 따라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빨간 머리 아가씨를 잘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설마 제가요?’

‘가만히 있어도 그 아가씨가 다가올 거예요. 이 저택에 오래 붙어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산을 마쳤을 테니까. 우선 당신과 내 환심을 얻으려 하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지켜봐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어보고.’

루시안의 예상대로 마우드는 라비엘리에게 무척 친근하게 굴었다.

“어때요, 맛있죠? 고소하고 바삭바삭하고 적당히 달죠?”

“네, 괜찮네요.”

“에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맛있는 거예요. 귀한 가문의 영애라 이것보다 좋은 거 많이 먹어봤다 이거예요?”

마이어가에 온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테아노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라비엘리를 따로 찾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사이 마우드의 예상대로 테아노는 헤레스를 불렀다.

헤레스는 그녀가 요구한 돈을 받지 못했지만, 일단은 마우드와의 약속을 지켰다.

마우드가 아이를 가졌고 분명히 마이어 가의 씨라는 걸 확인해준 것이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농담. 르휜 양한테는 무슨 말을 못 하겠다니까. 로제도 함께 먹으면 좋았을 텐데. 메이지랑 꼭 붙어서 어딜 그렇게 다니나 몰라.”

마우드가 쿠키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시장에 갔어요.”

“알아요,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나만 쏙 빼놓고 갔거든요.”

라비엘리는 그저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마우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접시 위에 가득했던 쿠키가 어느덧 바닥을 보일 즈음, 마우드가 제 볼을 매만지며 말문을 열었다.

“저, 르휜 양.”

“네.”

“저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라는 말에 라비엘리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거지?

“혹시 돈 좀 있어요?”

“네? 뭐라고요?”

“돈이요. 내가 지금 좀 급하게 쓸데가 있어서 그래요.”

갑작스러운 말에 당혹스러웠다.

“미안하지만 빌려줄 만큼의 돈 없어요.”

“그럼 얼마나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많이 빌려주지 않아도 되는데.”

마우드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지내면서 돈이 크게 필요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리고 메이든 씨가 용돈으로 챙겨주시는 게 있지 않나요?”

“어휴, 그걸 누구 코에 붙여요. 내가 딱 200 크랜만 더 달라고 해도 아주 들은 척도 안 해요.”

“…….”

“한 달에 겨우 300 크랜밖에 안 줘요. 그걸로 뭘 하겠어요?”

라비엘리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몰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마우드는 집요하게 말을 이어갔다.

“르휜가에서 양도받는 게 있을 거 아녜요. 혹시 몰래 감춰둔 돈 좀 없어요?”

“네, 없어요.”

“가문에서 가지고 나온 것도 없을까요? 꼭 돈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팔면 되니까.”

무례한 언행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조금만 더 대화를 이어갔다간 정말 화를 낼 것만 같았다.

“네? 보석이라던가 목걸이나 팔찌 이런 거 말이에요.”

“없어요, 렉토르 양.”

“그럼 후작님이 선물로 주신 건 없어요?”

“없어요.”

라비엘리가 고개를 젓자 마우드는 풀죽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마이어 가에 입성하지 않았는가.

아이가 태어나면 후계를 이을 테고 지금에야 큰돈이 필요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돌연 중요한 비밀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안이 말하던 게 이런 건가.’

그게 무엇인지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루시안이 있었다면.’

루시안이라면 어떻게든 이유를 알아냈을 것이다.

“저, 렉토르 양.”

마우드는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요?”

“무슨 일인지는 말하기 어렵고요.”

“네.”

“필요한 돈이 뭐 많다고 생각하면 많고, 적다면 적고.”

마우드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더니-

“한 5000 크랜 정도 필요해요.”

“뭐라고요? 5000 크랜이라고요?”

“르휜 양, 동네방네 소문낼 게 아니면 목소리 좀 낮춰줄래요?”

마우드는 검지를 뻗어 입술에 대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너무 큰 돈이잖아요.”

“그러니까 르휜 양에게 부탁했죠.”

액수를 듣자마자 라비엘리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큰돈이 필요한 일이 대체 뭘까?

이미 살 곳도 있고 집사로부터 경제적 지원도 받고 있다.

분명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루시안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비엘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가 한 번 알아볼까요?”

어떻게 할 계획인지 생각지도 않고 라비엘리는 불쑥 이렇게 말해버렸다.

“어머.”

“그래도… 당신보다는 내가 여기 오래 있었고, 아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까.”

“정말요? 정말 그래줄 거예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알아만 본다는 거니까.”

하지만 마우드는 이미 돈을 받은 것처럼 라비엘리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고마워요.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왔다니까. 당신이 내 편이라는 아주 강렬한 느낌이 말이에요.”

“그런데 어디에 쓸지도 모르고 움직일 수는 없어요.”

라비엘리가 처음으로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마우드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쉽게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걸까.

그렇게 큰돈이 필요한 일이 대체 뭘까.

“후작님께 부탁드려보는 건 어때요? 렉토르 양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실 것 같은데. 그분께 5000 크랜은 큰돈도 아니고요.”

은근슬쩍 묻자 마우드는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르휜 양, 후작님께는 절대 비밀이에요. 알았죠?”

그러더니 남은 쿠키를 하나 집어 오독오독 씹기 시작했다.

“그럴게요. 그럼 루시안에게는 부탁해도 될까요?”

라비엘리가 다시 한번 묻자 마우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그 남자는 어때요?”

“어떻냐니요?”

“성격은 어떤지, 뭘 하는 사람인지, 여성 편력이 있는지 정도?”

“의사예요.”

라비엘리는 부러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머, 그래요? 의사?”

“여성 편력이나 성격은 저도 모르겠어요.”

“믿을만한 사람인가요?”

루시안은 믿을만한 사람인가.

라비엘리는 제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네, 꽤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 * *

“젠장.”

테아노는 장부를 정리하다 말고 펜을 내던졌다.

요 며칠 가만히 있다가도 불쑥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일의 순서와 과정과 결과가 중요한 인물이었다. 갑작스러운 것은 질색인데다 정리되지 않은 일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택에 온 이후, 테아노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고 매사 피곤해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연달아 벌어진 탓일까. 어처구니없는 일, 좋은 일, 당혹스러운 일이 겹치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휴.”

그래, 에몬이 죽은 건 어쩔 수 없고 그의 재산을 환수한 것만 생각하자.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었다.

신은 공평한 듯 공평하지 않다.

이 나이쯤 먹으니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빨간 머리 여자를 마이어 가의 안주인으로 앉힐 수는 없었다.

출신도 불분명한 여인을 들일 수는 없다.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한데 이미 로튼 일대에 다 퍼졌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눈엣가시 같은 것이 바로 옆에 둘이나 달라붙어 있다.

‘환장할 노릇이로군.’

테아노가 머리를 싸쥐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맥없이 대답하자 문이 열리더니 루시안 마이어가 걸어 들어왔다.

“늦은 시간까지 바쁘시군요.”

루시안은 책상 위에 어지러이 쌓여있는 서류 더미를 힐끗거리더니 말했다.

“몸 생각하셔야지요. 곧 아버지가 되실 텐데.”

테아노는 메마른 눈으로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테아노와 시선이 마주치자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루시안은 테아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틀었다. 그러고는 테아노의 방을 훑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취향은 제가 잘 알지요.”

“…….”

“이 방에 놓인 가구만 봐도 알겠군요. 우아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특별해야 해. 모든 게 조화롭군요. 물론 전부 완벽한 건 아니지만.”

루시안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러 온 거지? 갑자기 가구에 관심이라도 생긴 건가?”

그렇지 않아도 속이 시끄러웠다. 테아노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눈을 감았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그가 제발 나갔으면 싶었다.

“아버지께서 고민이 많으실 것 같아서 좀 덜어드리려고요.”

“뭐?”

“취향이 아닌 걸 계속 둘 순 없잖아요. 이 가구는 어울리지 않는데… 치우는 게 어때요?”

루시안이 낮은 서랍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게 무슨.”

“치우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 순간, 테아노는 방 안에 내려앉은 묘한 공기를 느꼈다.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해보라고 말하려던 찰나-

루시안이 가만히 말했다.

“아기가 더 크기 전에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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