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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15)화 (115/136)

115화

이튿날 늦은 오후, 테아노가 긴 출타를 마치고 저택에 돌아왔다.

그는 라비엘리를 품에 안을 것이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아이에게 물려줄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군.’

유서도, 상속받을 이도 남아 있지 않은 탓에 에몬의 재산은 전부 로튼의 영주인 테아노에게로 귀속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 우선 흩어져있는 재산을 한데 모으고 현물과 건물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돈을 생각하면 흐뭇해지다가도 이내 떠오른 생각에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루시안 마이어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에몬이 없으니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도,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몰랐다.

솔직한 속내를 아는 유일한 사내가 죽었으니 영 곤란하였다.

사람을 쓰는 일이야 돈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믿을만한 자를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자와 신뢰를 쌓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저택에 간다고 해서 완전한 평화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 여러분! 후작님께서 드디어 오셨어요!”

“…….”

테아노는 마우드를 마주하고 기절할 만큼 놀랐지만,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얼굴이 너무 거칠어지셨어요. 이를 어쩜 좋아.”

마우드는 테아노가 도착하기 전, 제가 사교계에서 사귄 이들을 불러선 환영 파티를 열어 놓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어 후사가 생긴 것을 축하드린다, 귀여운 아이의 웃음소리로 가득하겠다,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이냐 퍼붓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 그러니까… 나는.”

“그렇지 않아도 다들 후작님의 후사를 궁금해했답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아니, 지금 이게 무슨.”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날 밤 우리의 아이가 생겼고, 제가 잘 품고 있었거든요.”

“…아이라고?”

“행여 중요한 일을 하시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얌전히 이곳으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후작님.”

“후작님을 닮아 대단한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뒤따라 들어온 라비엘리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사람… 엘던에서 본 여자잖아.’

대체 어느 틈에 이곳에 와서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거지?

로제 역시 라비엘리 못지않게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주변을 의식했는지 놀란 표정을 거두고 적당히 분위기를 살폈다.

“아가씨, 이게 다 무슨 일일까요.”

라비엘리도 그녀를 따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저 여자, 에몬 씨가 데려온 여자 맞죠? 제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죠?”

“네, 맞아요.”

테아노를 쳐다보자 그는 태연한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니,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재밌게 돌아가네.”

그런 와중에 루시안은 느긋하게 걸어 들어와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하나 집어 들었다.

테아노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신 못 차리는 꼴이 우스웠다.

‘생각보다 빨리 처리할 수 있겠어.’

고개를 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넘기려는데 때마침 마우드와 눈이 마주쳤다.

마우드는 루시안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한쪽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팽 고개를 돌리더니 사라져버렸다.

“당신 알고 있었어요?”

어느 틈에 다가온 라비엘리가 루시안에게 물었다.

“뭘?”

“…저 아가씨요.”

라비엘리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자, 루시안은 그녀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아가씨라니. 이제 부인인걸.”

“농담하지 말고요. 여기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루시안은 와인잔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몰랐습니다.”

“그럼 그건 정말… 일까요?”

짤막하게 오가는 대화였지만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았다.

정말 테아노의 아이를 가진 것일까.

루시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니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요? 대체 왜 그런 짓을.”

라비엘리가 얼굴을 구깃거리자, 루시안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소곤거렸다.

“뻔한 수작이에요. 설계대로 움직이는 거고 순진한 남자가 걸려들었을 뿐.”

라비엘리는 순진한 남자라는 대목에서 하마터면 헛구역질을 할뻔했다.

“돈 때문인가요?”

루시안은 사람들 사이에서 깔깔거리는 마우드를 유심히 보더니-

“글쎄, 그것보다 더 큰 걸 원하는 것 같은데.”

“더 큰 거라니.”

“잘됐다고 생각해요. 예상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겠어.”

라비엘리는 마우드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저택에 오늘처럼 사람이 많은 것도, 지금과 같은 분위기도 처음이었다.

마이어 가에서 사교계 행사가 있긴 했어도 오늘처럼 화려하게 꾸며놓은 적은 없었으니까.

테아노는 멀리서 보아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다.

‘쉽게 처리할 수 있겠다고?’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루시안이 무얼 하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편히 생각하기로 한 라비엘리가 와인잔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루시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라비엘리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루시안이 내민 건 앙증맞은 머리핀이었다.

라비엘리가 눈으로만 빤히 보고 있자, 루시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돌리더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가 흘러내리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불편해 보여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의 핀에 작고 동그란 진주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라비엘리는 가볍게 웃으며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으며 속내를 숨기고 있었지만, 목울대가 한 번 꿀렁이는 것까지는 참지 못했다.

“예뻐요. 이건 언제 샀어요?”

라비엘리는 바로 앞머리를 모아선 핀을 꽂아보았다.

“괜찮은가요?”

그녀가 묻자 루시안은 꽤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거울도 안 보고 바로 할 수 있네요.”

“네, 이 정도야 뭐.”

그러자 루시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

“아닙니다.”

“거울없 이 머리핀 꽂는 게 왜요?”

“잘했으니 됐어요.”

“뭔데 그래요.”

“와인 마실래요?”

“말 돌리니 더 수상하네. 대체 뭔데 그래요?”

라비엘리가 추긍하자 루시안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품 안에서 자그마한 손거울을 꺼냈다.

“필요할 줄 알고 같이 샀는데.”

“어머.”

루시안은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라비엘리의 얼굴 가까이 거울을 들이밀었다.

“됐으니 본인이 얼마나 예쁜지나 한 번 봐요.”

“당신 정말.”

라비엘리는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무안한 얼굴로 서 있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이번엔 혼자 들어가는 게 어색하지 않았어요? 머리핀을 파는 곳이라면 여인들로 가득했을 텐데.”

그녀가 놀리듯 말하자 루시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라서.”

라비엘리는 정말 루시안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난 당신이… 한 마디도 안 하길래. 머리 자른 걸 모르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댕강 잘라놓고 모르는 줄 알았다고요?”

“보고 나서 별말이 없길래요.”

하지만 이내 마지막 말을 내뱉은 걸 후회했다.

꼭 루시안이 무슨 반응이라도 하길 바란 것처럼 보일게 뻔했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혼자 있었다면 뺨이라도 두드렸을 것 같았다.

“아녜요, 못들은 걸로 해요. 그리고 이거… 고마워요.”

“혼자서 곰곰이 생각했어요. 긴 머리를 잘라야 했던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면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당신 머리카락은 가벼워졌는데 내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어.”

“그냥요. 레비를 따라 나갔다가… 충동적으로.”

라비엘리가 멋쩍은 얼굴로 얼굴을 매만지더니 말을 이었다.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 같이 있다 보니 나까지 충동적인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아.”

“와, 그걸 그렇게 떠넘긴다고요?”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루시안은 대답 없이 라비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엘리, 춤출 줄 알죠?”

그 무렵 라비엘리의 귓가에도 익숙한 음악이 흘러들었다.

“춤추기에 적합한 복장은 아닌데.”

완곡한 거절의 뜻을 비추었으나 이미 한 손은 루시안에게 잡힌 뒤였다.

“상관없어요. 나도 춤추기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거든.”

그의 말에 이번에도 웃고 말았다.

당사자의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테아노 환영파티는 밤늦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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