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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14)화 (114/136)

114화

“뭐? 누가 오신다고요?”

아침을 거하게 먹고 후식으로 신선한 사과를 하나 먹으려던 찰나였다.

마우드는 사과를 집어 든 채로 그대로 얼어버렸다.

“후작님이요. 곧 후작님께서 돌아오신대요. 그리고 저희 아가씨도 오신답니다.”

마른 수건으로 식탁을 능숙하게 닦으며 메이지가 말했다.

걸레질하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니, 그녀는 제가 모시던 주인이 돌아오는 일이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후작이 벌써 온다고? 이렇게나 빨리?’

하지만 속내를 태연히 감추며 마우드는 싱긋 웃었다.

“그이가 드디어 오는군요. 아이, 신나라!”

“네, 예정보다 빨리 돌아오시네요.”

“아마 저와 제 아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마우드는 들고 있던 사과를 그대로 입 안에 넣었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사과는 아삭아삭한 데다 향이 좋았지만 어쩐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참, 메이지.”

마우드가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메이지를 불렀다.

“네, 렉토르 양.”

“그 아가씨라는 사람은.”

뒷말을 흘리자 메이지가 곧바로 대답했다.

“네, 라비엘리 르휜 양이요. 후작님께서 돌봐주고 계시지요.”

“아하.”

마우드는 연약한 얼굴의 라비엘리를 생각해냈다. 동시에 그녀의 곁에 있던 잘생긴 사내도 떠올렸다.

‘그 남자도 같이 오겠군. 따로 오는 게 나을 텐데 세 사람이 같이 온다니 조금 골치 아픈걸.’

“저는 그럼 준비할 것이 많아서 이만.”

메이지가 나가자 마우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입만 오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겁먹지 마. 준비는 잘해뒀으니까.”

테아노의 저택에 온 직후, 마우드는 놀고먹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열심히 로튼의 시내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마우드는 천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데다 도도해 예의나 매너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화끈하고 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녀의 독특한 매력은 로튼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데다 매력적인 외모 덕분에 마우드는 금세 로튼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물론 유명해지는 데는 테아노 마이어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그이가 얼마나 어리광을 부리는지 몰라요.’

‘어리광이라고요? 후작님께서요?”

‘네, 그렇다니까요.’

‘세상에, 믿을 수가 없네요!’

‘후작님께선 제 품에 있을 때 꼭 천국에 온 것 같다고 하셨지요.’

‘어머, 어머…….’

‘그래서 제가, 여기가 천국이면 당신은 신이라고 말했어요.’

‘세상에.’

‘그랬더니 저를 뭐라고 불렀는지 아세요?’

‘뭐라고 부르셨나요?’

‘천사라고 하셨답니다.’

‘오, 맙소사.’

‘세상에서 가장 야한 천사라고 말예요. 호호호!’

소문이 무섭게 났으니 후작은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안했다. 마우드는 로튼의 여인들에게서 산파 헤레스에 관해 전해 들었다.

로튼의 아이들은 전부 그녀가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의사보다 여인의 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어 임신이나 부부 관계에 곤란을 겪으면 무조건 그녀를 찾는다고 했다.

‘그래, 헤레스가 필요해.’

헤레스의 환심을 사는 데는 꽤 여러 날이 걸렸다. 높은 이름값답게 까다로웠으며 비위를 맞추는 게 어려웠다.

‘헤레스, 잘만 해결되면 한 몫 단단히 챙겨 줄게요.’

‘저는 신의로 먹고사는 사람이에요. 돈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요. 돌아가세요, 렉토르 양.’

‘어쩜 그렇게 매정하세요. 이건 거짓말이 아녜요.’

‘없는 아이를 있다고 말해달라는 게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직 생기지 않았을 뿐이라고요. 저는 그저… 후작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예요.’

‘…….’

‘들어봐요, 헤레스. 난 후작님과 특별한 사이예요.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마이어가에서 지낼 수 있겠어요? 후작님이 안 계신 지금, 내가 마이어가의 안주인으로 모든 살림을 도맡고 있다고요.’

‘흐음.’

‘헤레스, 아이는 결국 생길 거예요. 후작님이 오셔서 만약 몇 가지를 묻거든 내게 유리한 쪽으로만 대답해줘요. 굳이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좋아요.’

‘…….’

‘…렉토르 양, 나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에요. 은밀한 일을 하는데 입이 가벼웠다면 지금처럼 오래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

‘렉토르 양이 무슨 수를 써서 후작님의 저택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분의 속을 알고 있어요. 그분에게는 다른 여인이 있습니다.’

‘전에 여자가 있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난 테아노 후작님의 아이를 낳을 거예요. 내 아이는 마이어 가의 유일한 장자가 될 테고, 그 아이는 작위를 물려받게 될 겁니다. 영지를 다스리고 로튼을 손에 넣을 거라고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로군.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겁니까?’

‘나와 내 아들이 받게 될 재산의 절반을 드릴게요. 어때요,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겠어요?’

“돈 앞에 장사 없지. 언제 그렇게 큰돈을 만져보겠어?”

마우드는 사과 한 쪽을 더 집어 들고 와작 깨물었다.

물론 헤레스가 남긴 말 중 한 가지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다른 여자라.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요.”

“렉토르 양,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마우드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서는 밖으로 나갔다.

하녀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가자 헤레스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우드는 하녀들의 시선을 살피고는 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어서와요. 그렇지않아도 산파의 검진을 한 번 받아보려던 참이었는데. 고마워요.”

헤레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여긴 왜 왔어요?”

그러자 헤레스는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메이지, 차는 됐으니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네, 렉토르 양.”

사용인들이 전부 나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그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거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마우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태연하게 대꾸했다.

“잘 왔어요. 나도 확실한 걸 좋아하거든요.”

마우드는 해사하게 웃으며 헤레스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헤레스는 앉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나는 조금 더 확실한 걸 원해요, 렉토르 양. 만약 내가 원하는 만큼을 보장한다면 당신을 돕지요.”

마우드는 뛸 듯이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좋아요, 우리 거래를 문서로 남기고 법원에 가서 서명을 받는 건 어때요? 이 정도면… 확실하겠지요?”

그녀의 말에 헤레스는 교교히 웃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좋습니다, 렉토르 양. 그런데 만약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어쩔 생각입니까?”

“걱정 말아요. 만에 하나 생기지 않으면 어디서 만들어오든, 사오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마우드는 목소리를 있는 대로 낮추고는 말문을 이어갔다.

“곧 후작님께서 오실 거예요. 그리고… 그분은 아직 제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몰라요.”

“…….”

“아마 당신을 부를 거예요. 확인하고 싶겠지.”

헤레스는 그제야 그 교활한 여자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때 잘 해주리라 믿어요.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탔으니까. 알았죠?”

헤레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렉토르 양.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어요.”

“아.”

마우드는 여유로운 척 웃었지만,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일단 얼마든 내놓으라는 뜻이지?’

지금 당장은 헤레스에게 줄 수 있는 돈이 없었다.

“후작님이 오시면 바로 수표를 써 드리지요.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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