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13)화 (113/136)

113화

레브리안이 선물을 들고 사람들에게 간 사이, 라비엘리는 방으로 들어왔다.

“휴.”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조물조물한 뒤 거울 앞에 섰다.

눈썹을 비뚜름하게 했다가 미간에 힘도 한 번 주어본다. 아침과는 다른 머리 스타일이 영 낯선 탓이다.

“괜한 짓을 했나.”

선물을 사러 다니면서 레브리안과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늘 저를 괴롭혀오던 문제가 해결돼서인지, 아니면 라비엘리와 함께해서인지 레브리안은 무척 들떠있었다.

그러다 레브리안의 손에 이끌려 작지만 화려한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저 구경만 할 요량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옆에서 한두 마디씩 거드는 말에 홀려 몇 번 고개를 끄덕인 것 같은데,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올라와 있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라비엘리는 짧아진 머리가 어색했지만 마음에 들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이후 지금처럼 머리카락이 짧은 건 처음이었다.

“…나쁘지 않은걸.”

내내 이상한 표정을 짓다 처음으로 활짝 웃어보았다.

제 모습이 어색하지만 거울 속 여인은 분명 웃고 있었다.

머리 스타일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새로운 기분이었다.

다만, 앞머리가 조금 짧아 자꾸 흘러내리는 것이 불편했다.

라비엘리는 앞머리를 계속 옆으로 넘겨 보았지만 도로 흘러내렸다.

“어색하긴 하지만 머리야 금방 자라겠지.”

라비엘리는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따라 마시고는 오전에 읽다 만 책을 펼쳤다.

레브리안이 재미있다며 추천해준 소설이었는데, 초반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나 읽을수록 빠져들고 있었다.

꿈속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후- 그렇게 한동안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루시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에 있습니까?”

라비엘리는 평소같이 않게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읽던 책을 황급히 덮은 뒤 제 머리를 두어 번 매만졌다.

“후.”

문을 열기 전 가볍게 심호흡까지 했다.

루시안이 찾아오는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마음이 묘하게 불편했다.

“무슨 일이에요?”

“미리 가방을 챙기는 게.”

루시안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멈추었다.

라비엘리는 그의 시선이 제 머리에 닿았다는 걸 알았다.

머리에 관한 말을 한마디라도 한다면 얼굴색이 변할 것만 같았다.

속내를 들키는 게 싫어 헛기침을 하자, 루시안이 못다한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마이어 가로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 저녁에 미리 가방을 챙기는 게 좋겠어요.”

“내일이요?”

“네, 태후 전하께서 내일 황궁으로 돌아가십니다. 병세는 완전히 호전되셨고 이제는 집이 그리우시다는군요.”

거기까지 말한 루시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후 전하께서 후작을 곁에 두고 싶어 엄청난 액수를 불렀다는데.”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루아침에 억만장자가 되었으니.”

“거절했나요?”

“네.”

아쉬운 소식이었다.

“그렇군요.”

“내일 당신 동생도, 클라인도 이온으로 돌아가니 우리도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라비엘리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데.”

루시안은 문가에 슬쩍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뭐가요?”

“나와 함께 마이어가로 가는 겁니까?”

루시안의 질문에 라비엘리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전처럼 마른 입술을 붙이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의 화법에 익숙해진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나요?”

그러자 루시안이 어딘가 야릇한 향기를 풍기며 라비엘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뇨, 없습니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어요.”

“여기서 해도 문제없는 이야기입니까?”

루시안은 두 손을 들었다 내리며 물었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잠깐 들어올래요?”

“빠르기도 하지.”

루시안이 안으로 들어오자 라비엘리는 입술을 한 번 비죽거린 뒤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해야 하는 이야기가 뭔지 꽤 궁금하네.”

사실 그에게 말하고 싶은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로제와 함께 마이어 가로 갈게요. 하지만.”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곳이 제 종착지는 아니라는 건 분명히 해두고 싶어요.”

지금 당장은 루시안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진 것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물론 레브리안에게 부탁한다면 이온가에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한 이온가의 사람이 아니다. 적응하는데에도 시간이 꽤 필요할 것이다.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루시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나른히 웃어 보이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고마워요.”

사실 라비엘리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테아노와 함께 마이어 가로 간다면, 아마 그는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엘던에서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를 생각만 해도 오싹해졌다. 그런데 그의 저택으로 들어가면 저를 어떻게 대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과 함께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은 테아노 후작님이 내 후견인이에요.”

라비엘리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해요.”

끔찍한 생각이었지만 라비엘리는 한시라도 빨리 루시안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아버지를 언제 죽일 것이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라비엘리가 차마 꺼내지 못한 진심을 떨리는 목소리에 섞어 흘려보냈다.

루시안은 눈치가 빠른 사내니 알아들으리라 생각하면서.

“걱정 말아요. 당신이 마이어 가에 머무는 동안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할 테니.”

“어떻게 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되겠죠.”

“생각해 봐, 내가 지금까지 당신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지.”

그러고는 한쪽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아름다운 동시에 천진한 미소였다. 그가 제게 호의적이라는 것도, 저 역시 그를 미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니엘에게서 온 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부디 안전하길 바랍니다.’

곱씹을수록 무서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루시안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더는 그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라비엘리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테아노 후작께서 로튼으로 돌아가시면, 그분에게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겠네요.”

그러자 루시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나 싶은 눈빛이었다.

라비엘리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건데, 당신 친구 말이에요.”

“…….”

“이번에 돌아가면 후작님께 제대로 부탁해보는 건 어떨까 해서.”

거기까지 말한 라비엘리는 은근히 루시안의 눈치를 보았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니엘 페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루시안이 그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두 사람에 관해 조금 더 자세한 걸 알고 싶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루시안은 조금 전 라비엘리가 꺼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갑자기 내 친구의 안위가 걱정됐어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그냥 조금 신경이 쓰여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라비엘리는 제 변명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내 친구를 생각해준 건 고맙지만, 다른 사람 일에 너무 신경 쓰는 건 어쩐지 싫은데.”

루시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난 그저 가족처럼 소중한 친구라기에.”

“맞아요. 가족 그 이상의 존재지.”

“단순히 같은 아카데미를 다녀서만은 아닌 것 같은데.”

라비엘리가 은근히 묻자 루시안이 가볍게 대꾸했다.

“당신 아카데미에서 사고 쳐 본 적 없죠?”

“사고요?”

“온갖 말썽을 다 부리면 상대적으로 끈끈해지거든.”

루시안은 대충 대답하고는 문가로 향했다.

“책 마저 읽고 쉬어요. 내일부터는 꽤 오래 달려야 하니까.”

“그래요.”

라비엘리는 무언가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할 말이라도?”

“아뇨, 잘 가요.”

루시안은 싱겁다는 듯 한 번 웃고는 돌아섰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라비엘리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니엘 페른에 관한 건 듣지 못했고, 테아노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라비엘리의 마음을 언짢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머리가 달라졌는데 못 알아본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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