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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12)화 (112/136)

112화

에몬이 사망한 사건은 예상과는 다르게 조용히 지나갔다.

대신관 하비네스는 현장을 처음 목격한 사제들과 에몬의 시신을 조사한 검시원의 입을 철저히 막았다.

그는 클라인의 자백은 묵살하고 에몬의 죽음을 총기 오발 사고로 일단락지었다.

대신관은 제가 아끼던 신관이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루미온 신전에서 신관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도는 것 역시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클라인이 신전을 떠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하비네스는 그를 어르고 협박하고 부탁하고 매달려도 보았지만, 클라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하비네스와 실랑이하는 동안에도, 클라인은 차근차근 이온 가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는 사이 레브리안에 관해 묘한 소문이 돌았지만, 라비엘리가 나서서 그녀가 백작가의 여인이었다는 사실과 신원을 보증해주었다.

살아있는 자들은 그렇게 각자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었지만, 죽은 자에게는 다소 우울한 마무리만이 남았다.

에몬은 가족도 친지도 없었다. 사후에 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짤막한 유서 한 줄 남겨놓지 않았다.

그는 제 행운을 과신했다.

에몬에게는 오직 돈뿐이었으나 돈은 그를 위해 한마디도 해주지 못했다.

결국 에몬의 사업장과 여관, 현물과 저택은 전부 생전에 그가 살았던 로튼의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영주인 마이어 후작이 신전에 머무는 중이라 테아노의 사인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테아노는 단번에 엄청난 부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평생 돈을 좇은 사내의 일생은 연고도 없는 오스트린의 어느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으로 초라하게 끝이 났다.

* * *

라비엘리와 레브리안은 불룩한 종이봉투를 끌어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레브리안에게 오늘은 신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받은 급여와 그간 모은 돈을 탈탈 털어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잔뜩 샀다.

“푸른색으로 살 걸 그랬나? 생각해 보니 루스는 푸른색을 좋아하는데.”

“푸른색 머리 두건을 샀으니 괜찮아.”

“하나 더 살걸. 루스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레비의 선물이잖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루스는 레브리안이 처음 신전을 드나들던 시절부터 그녀를 살펴준 여인이었다.

레브리안을 아끼는 마음이 남달라 클라인의 시선을 누구보다 경계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브리안이 클라인을 따라 이온가로 간다는 것을 알고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였다.

“루스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야. 내가 친 사고를 수습해준 것도, 늘 내 편에서 주었던 것도 전부 루스였거든.”

“그럼 겨우 이런 걸로는 안 되겠는데.”

라비엘리가 손에 든 종이봉투를 한 번 들어 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언니, 역시 그렇지? 색깔별로 샀어야 했나 봐. 하지만 모은 돈이 얼마 없었어.”

레브리안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설렘이 잔뜩 뒤엉켜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감, 잘 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불안과 떨림이 혼재된 얼굴이다.

“신관… 아니, 클라인 님은 아무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셨지만 사실 무서워.”

“무섭고 두려운 게 당연해. 하지만 넌 어디서든 씩씩하게 잘 해낼 거야.”

“든든한 언니가 있는데 걱정할 필요 없지.”

레브리안이 히죽거리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얼마 전에 말이야.”

“응.”

“그분께서… 만약 이온 가에서 지내다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꼭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셨어. 내게 힘이 되어주신다고.”

“그분이라니?”

라비엘리는 되묻는 동시에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다.

“…아.”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조금 무섭긴 해도.”

레브리안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

“언니는 무섭지 않아?”

이번에도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주저했다. 그러자 레브리안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이 내 편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안심돼. 무슨 일이든 해결해 줄 것만 같고… 실제로도 그랬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긴 해도 함께 있는 동안 든든한 건 사실이었다.

얼마나 오래 믿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레비.”

“응.”

“그날… 대체 왜 그런 거야?”

내내 궁금했고 묻고 싶었다. 보는 눈과 귀가 많아 신전에서는 함부로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라비엘리의 질문에 레브리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모르겠어. 충동적으로 그랬던 것 같아.”

“충동적이었다고?”

“사실 그 사람에게 뺨을 맞았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걸 포기했어. 이제 정말 끝이구나, 벗어날 수 없겠구나… 하고 말이야.”

레브리안은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 짧게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 언니와 그분이 나서주었잖아. 날 위해 말이야. 그건 엄청난 용기라는 걸 알고 있어. 그분이 날 대신해서 에몬을 죽였지만, 사실 내 마음도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했다고 나섰어.”

“레브리안.”

“괜히 나 때문에 이 일과 관련 없는 사람이 감옥에 가는 걸 두고 볼 수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레브리안이 나섰기 때문에 클라인도 움직였다. 모든 것이 연쇄적이고 유기적으로 맞물려 해결된 것이다.

“레비, 전부 다 잊고 행복해야 해. 알았지?”

“다신 못 볼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지 마. 어느 정도 정리되면 초대할게. 꼭 올 거지?”

“물론이지. 기다리고 있을게.”

즐거운 얼굴로 얼마간 걷던 레브리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엘리 언니. 그 사람이랑 대체 무슨 관계야?”

라비엘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에 알아들었다.

하지만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관계냐니?”

어느덧 신전과 꽤 가까워진 터라 레브리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후작님의 아들인 건 맞는 거지?”

레브리안은 루시안이 남긴 말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절대 알아선 안 될 비밀이라는 말을 끝으로 에몬의 머리를 날려버리지 않았던가.

레브리안은 라비엘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물었다.

“후작님이 바쁘시니, 그분이 대신하고 계신 거야?”

정확한 건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그런 셈이긴 해.”

“뭐야, 그런 셈이라니. 정말 그게 전부야?”

레브리안은 팔꿈치로 라비엘리를 툭 밀며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그게 전부야.”

돌이켜 보니 꽤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도, 견디기 어려웠던 날도,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분명 잘못된 만남이었다. 어긋나고 비뚤어진 인연이었다. 다만 경솔하고 미친 사내라고 생각했던 처음의 마음은 누그러지고 지금은 그를 꽤 의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루시안과 무슨 사이인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굳이 그와의 사이를 정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그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루시안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분명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겠지.’

이상한 소리라고 치부했는데 그의 나른한 시선이 떠올랐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질감이 느껴지는 보들보들한 머리카락과 한 올 한 올 바르게 난 눈썹, 그보다 더 섬세한 눈동자.

‘안녕, 레이디.’

그 순간, 목구멍이 바짝 마르더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언니, 많이 무거워? 얼굴이 빨개.”

“아냐, 이 정도로 뭘.”

“지푸라기처럼 말라가지고. 이리 내, 내 봉투에 좀 옮겨 담게.”

“됐어! 괜찮다니까.”

“그럼 뭔데.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

“아냐, 그런 거.”

짐을 옮기느니 마느니, 내가 더 들겠네 하면서 실랑이하다 눈이 마주쳤다.

와하하 한차례 웃고 나자 열감이 천천히 식었다.

“엘리 언니.”

“응.”

“언니가 내 행복을 바라는 것처럼… 나도 언니의 행복을 바라.”

“레비.”

“후작님과 그분의 아들이 언니를 지켜주고 있는 건 다행이지만, 지금도 그리 안정된 상황은 아니니까.”

“…….”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때였다.

라비엘리의 머릿속에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레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뭐든 말해 봐.”

“아무것도 묻지 말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니?”

레브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온가에 도착하면 내게 편지를 보내 줘.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으니 꼭 나 혼자 오라고 말이야.”

“혼자?”

“응.”

“무슨 일인데 그래.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 언니.”

레브리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라비엘리는 되레 환하게 웃어 보였다.

“부탁할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혼자 움직이는 게 어려워서 그래. 알다시피 난 마이어 가의 보호를 받고 있잖아.”

“꼭 혼자 가야만 하는 거야? 그러다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전혀 그런 일 아냐. 힐스에 있는 의원을 만나러 가야 하거든. 그런데 꼭 혼자 가야 해.”

레브리안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만난 뒤에는 바로 내게 와야 해.”

“그래, 약속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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