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방 안에는 라비엘리뿐이었지만 누가 볼세라 황급히 편지를 반으로 접었다.
가슴이 불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모든 문장이 낯설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루시안 마이어의 눈을 피해 만나러 오라고?’
루시안의 이름이 언급된 부분 때문에 숨기듯 편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니엘 페른?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낸 쪽은 라비엘리에 관해 잘 알고 있는 눈치다.
라비엘리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다시 편지를 펼쳤다. 필체는 반듯하지도, 정교한 맛도 없었다.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 혹은 나이가 지긋한 이의 필적처럼 보였다.
그런 이유로 라비엘리는 누군가 제게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라고 의심했다.
하지만 장난이라기에 편지지가 얇고 보드라운 것이 제법 값이 나가는 종이였다. 편지를 넣은 봉투 역시 마감이나 문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체 누구지. 누구기에 나더러 찾아오라는 걸까.’
행여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차분히 읽어내리는데 라비엘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라비엘리가 동생을 위해 뭐든 할 것이라 말했을 때 루시안은 제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했다.
목 아래부터는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병에 걸려 침대에 누운 채 남은 생을 보내는 친구.
‘다만, 내가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탓에 무례한 부탁을 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래… 같이 아카데미에서 의학을 공부했다고 했어. 힐스의 의원이라고 소개한 걸 보면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아.”
라비엘리는 마른침을 삼키고 루시안이 했던 말을 반추해보았다.
‘그 녀석이 가엾다 생각하면서도 예민하게 구는 걸 받아주지 못했어요.’
‘곁을 지켜준 것만으로도 친구는 고마웠을 거예요.’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실력이 좋은 녀석이었죠. 저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촉망받는 인재였어요.’
‘갑자기 그렇게 된 건가요?’
‘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친구분의 일은 유감이에요.’
그래서 테아노에게 부탁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걸 보낸 사람은… 루시안의 친구인 건가?”
그런데 왜 루시안 몰래 저를 찾아오라고 편지를 보낸 걸까.
루시안은 친구를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소개했고, 친구는 루시안의 눈을 피해 저를 찾아올 것을 당부했다.
심지어 마지막에 저를 찾아오기 전까지 부디 안전하길 바란다는 무서운 맺음말과 함께.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루시안은 평범한 사내가 아니다.
그를 마주하고 그와 함께하며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도 루시안에게는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부분이 있었고, 인간적인 모습에 어느 정도 의지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편지로 인해 그에게 무서운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것만 같았다.
‘루시안 마이어는 대체 어떤 사람이지?’
좀처럼 두려움이라고는 없으며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한 낯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를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라비엘리는 편지를 보낸 사람을 만나면 어쩐지 늘 품고 있던 의문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우선 편지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당장에라도 힐스로 가서 니엘 페른이라는 자를 만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갑자기 혼자 힐스에 간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내가 어디를 간다고 해도 따라올 게 분명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루시안의 눈을 피해 힐스로 갈 방법을 찾아야 해.
라비엘리가 초조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로제가 따뜻한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아니에요.”
그녀는 서둘러 찻잔을 내려놓더니 말문을 열었다.
“신전이 어수선해요. 외부에서 온 사람들도 많고요.”
“…그래요?”
“네, 누가 총에 맞아 죽었대요. 진짜인지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총소리가 크게 났다고 하는데 전 사실 못 들었거든요. 하도 여기저기서 말하는 통에 뭐가 진짜인지도 알 수 없네요.”
라비엘리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로제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 신전 안에서는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뭔가 일이 있긴 한 모양이에요. 신전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봐요. 사람이 죽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그러게요.”
“어머, 그러고 보니 우리 엘던에 있을 때도 갈라테이아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어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잖아요. 생각나요? 그때 아가씨 몸도 좋지 않은데 병사들이 와서 질문을 하느니 마느니 그랬잖아요.”
로제는 워낙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미라 별생각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라비엘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공연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로제, 미안해요. 그때 사냥꾼도… 에몬도 전부 루시안이 죽였어요.’
“사내들은 말로 하면 될 것을 왜들 그리 싸우고 죽이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신성한 공간에서 총을 쏘다니, 겁도 없지요! 신께서 얼마나 노여워하시겠어요. 여기 대신관님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요.”
“그러게요.”
라비엘리는 대충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이 영 불편했다.
레브리안은 괜찮을까.
어디에 있을까.
“로제, 혹시 누가… 그랬는지에 관한 얘기도 들었어요?”
로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다들 그걸 궁금해하는 눈치인데 정작 거기에 대한 말은 없더라고요.”
“그렇군요.”
“신전에서 총을 쏠 정도라면 보통내기는 아니겠지요. 이미 총을 쏘고 달아났을지도 모르고요. 어휴, 무서워라.”
라비엘리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제에게는 영원히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
그녀는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말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말이 많은 자들은 언제고 사고를 칠 수밖에 없다.
대신 가만히 앉아 여러 상황을 듣거나 새로운 정보를 알아내는 데는 무척 유용하였다.
“혹시… 태후 전하의 병증에 관해서 들은 건 없나요?”
라비엘리가 조심스레 묻자 로제가 눈을 빛냈다.
“그렇지 않아도 아가씨께서 궁금해하실 것 같았는데. 지금 태후 전하의 병증이 꽤 좋아져서 이제는 앉아서 식사도 하실 만큼 호전되셨다고 해요.”
“아.”
그 말은 곧 테아노가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제가 듣기로 후작님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데, 태후 전하께서 좀처럼 놓아주지 않으시나 봐요. 후작님이 옆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고요. 제국 최고의 의사이시니 당연한 말이겠지요. 아가씨의 후견인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라비엘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테아노가 신전에 묶여있다면, 루시안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표면적으로는 라비엘리가 부모님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싶다는 핑계로 왔지만,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레브리안이 동생인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적당한 때를 보아 마이어 가로 돌아가야 했다.
‘루시안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라비엘리는 적당히 미소를 띤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향이 좋네요, 로제. 무슨 차예요?”
그러자 로제는 싱긋 웃으며 차에 대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그게 무슨 말인가.”
테아노는 에몬의 사망 소식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죽었다니, 대체 누가.”
그가 혼잣말처럼 탄식하는 사이, 사제는 건조한 음성으로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저도 전달받은 내용이라 에몬 씨가 사망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정확한 사인 등은 조사 중이라 하니, 곧 별도로 보고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다음 주부터 필요한 약재는 다른 사람을 통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라니, 갑자기.”
“대신관께서 후작님이 원하시면 오스트린과 인근 약재상의 명단을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 이거 참.”
“준비해서 드릴까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 가져다주시오.”
사제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도 테아노는 멍청한 얼굴이었다.
“죽다니, 그것도 신전에서.”
물론 에몬은 적이 많은 사내였다. 하지만 그만큼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내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신전에서 죽었다니.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사망 소식만 가져온 것이 영 이상했다.
“젠장, 하필이면!”
에몬의 죽음이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마이어 가로 돌아가면 에몬을 통해 루시안을 처리하려 했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 화가 났다.
그에게 적당히 돈을 쥐여주면 루시안 정도는 가볍게 죽였을 텐데.
쉽게 해결할 기회가 날아간 게 아쉬웠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굴 통해서… 처리해야 하지?’
직접 사람을 쓰는 건 위험할 수 있다. 테아노는 이중, 삼중으로 조심해서 움직일 것이다.
‘그래, 일단 마이어 가로 돌아가야 해. 돌아가서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생각해야지.’
테아노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방 안을 배회하다 뚝 멈추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