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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10)화 (110/136)

110화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클라인은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작 레브리안은 클라인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신관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미안하구나. 내가 조금 더 빨리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면,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

“네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것 같아 괴롭고 슬프다.”

“신관님.”

“레브리안, 나는 용기 없고 한심한 사내였다.”

“…….”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그저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만.”

클라인은 뒷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순식간에 밀려든 향기-

가슴에서 시작된 열기가 눈으로 모이더니, 이내 눈물이 되어 부옇게 차올랐다.

“죄송해요.”

클라인을 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나른한 손길을 받는 꿈을 꿀 때면, 매번 익숙한 향기마저 느끼곤 했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지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욕망이었다.

“…죄송해요, 전부.”

클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자 레브리안이 떨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두렵고 불안했으나 그녀를 안는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모든 걸 정리하고 너와 함께하고 싶다.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

“분명 많은 말들이 오갈 테고… 상처받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전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지만, 행여 레비 너까지 다칠까 봐 걱정이구나.”

“신관님.”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피하지도 숨지도 않을 생각이다.”

레브리안은 고개를 들어 클라인을 바라보았다.

호수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 생각했던 청색 눈동자가 오롯이 저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이런 한심하고 겁쟁이인 나를… 기다려 주겠니?”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입을 열어 이 소중하고 조마조마한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마음을 확인한 순간, 마침내 불가능할 것 같았던 평화가 찾아왔다.

* * *

대신관 하비네스의 앞으로 불려간 루시안과 라비엘리는 생각보다 금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비네스는 그들에게 크게 궁금한 것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신관에서 물러나기로 한 클라인에게 꽂혀있었다.

에몬이 죽은 건 골치 아픈 일이었지만, 그보다 살인을 저지른 것이 신관이라는 점, 그게 하필이면 제가 가장 아끼는 클라인이라는 게 문제였다.

대신관의 집무실에서 나온 라비엘리는 숨을 내쉬었다.

“휴.”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안에 있는 레브리안이 염려되었으나 그래도 클라인과 함께 있으니 별문제 없으리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면죄부가 있으니 살인에 대한 책임은 피할 것이다.

라비엘리와 루시안은 길고 긴 복도를 지나 그들이 머무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쉬어요.”

“잠깐 들어와요.”

루시안을 붙잡은 건 라비엘리의 건조한 음성이었다.

그는 별말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나요?”

라비엘리는 문이 닫히자마자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럼 적어도 나한테는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적당히 침묵해야 될 때를 알고 침묵하라는 말 말고요.”

말하다 보니 공연히 짜증이 치밀었다.

“내 동생의 일이잖아요. 그럼 나에게는.”

“라비엘리.”

루시안이 두어 걸음 앞으로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말했다면 아마.”

“…….”

“당신 코가 빨개지는 바람에 모든 게 탄로 났을 겁니다.”

그러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분한 마음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지만, 라비엘리는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만약 에몬을 죽일 거라고 말했다면 가만히 있었을까.

분명 그를 말렸을 것이다.

‘말린다고 듣지도 않았겠지만.’

“신관님께서 레브리안에게 특별한 마음을 가졌다는 거 언제 알았어요?”

하지만 묻고 난 뒤에 곧바로 루시안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한테 눈치 없다고 한 게… 이 얘기였어요?”

레브리안과 있으면 클라인은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녀가 제 과거를 알아가며 흔들릴 때도, 클라인은 레브리안보다 훨씬 더 불안해했다.

“자매가 나란히 눈치가 없더군요. 그렇게 쳐다보는데 자기를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난 아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면 얼마든지.”

라비엘리는 달리 반박하지 않고 입술만 짓씹었다.

불행한 사건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가장 복잡한 일은 해결된 셈이었으니까.

“그럼 레브리안은 이제.”

“당신 동생은 아마 그 신관을 따라갈 거예요. 물론 하루아침에 두 사람이 인정받을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그를 믿어도 되겠지.”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클라인의 출신이 평범하지는 않을 터- 레브리안이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는 건 아닐지가 염려되었다.

“르휜 가의 딸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아는 것처럼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쓸쓸한 얼굴이었다.

“몰락한 귀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요.”

“이온은 꽤 권력욕이 있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아마 장자가 신의 아들로 평생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보다 여인을 데려와 후사를 갖는 쪽을 반가워할 겁니다.”

“그럴까요……?”

“당연하지.”

“그럼 당신은 이제 어쩔 생각이에요?”

“마이어 가로 돌아갈 겁니다.”

루시안은 이번에도 별 고민 없이 가볍게 대답했다.

“…….”

“나는 다시 마이어 가로 돌아가서.”

루시안이 뒷말을 흘리자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돌아간 뒤에는 어쩔 생각일까.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짓을 저지르진 않을 건데.”

루시안이 히죽 웃었지만 라비엘리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

“왠지 빨리 죽여달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리네.”

라비엘리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쓸 줄 몰랐지만, 루시안이 해결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가까이해선 안 될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위험한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점점 그에게 의지하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만약… 신관님께서 나서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생각 안 해봤는데.”

“뭐라고요?”

“면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지. 지하 감옥에 끌려가서 평생을 시체처럼 살았으려나.”

“…….”

“적어도 엘리가 면회는 와주겠지. 진흙탕에 빠질 뻔한 동생을 구해주었으니.”

“당신은 정말.”

“생각 안 해봐서 모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앞을 내다보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루시안이 장난스레 말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놀란 눈을 한 로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아가씨. 온종일 어디에 계셨어요?”

루시안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더니 문가로 향했다.

“많이 피곤하고 놀랐을 테니 따뜻한 걸 좀 챙겨줘요.”

“네, 그럴게요.”

그러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루시안이 사라지자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팔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참,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편지가 왔대요.”

“편지요?”

라비엘리는 의아한 눈으로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신전에 사는 것도 아닌데다,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이 없는데.

“내게 온 게 맞아요?”

“네, 여기… 보시면. 라비엘리 르휜 양에게 라고 적혀 있는걸요. 우편물을 정리하는 분이 전달해주셨어요.”

“아.”

“그럼 저는 차를 좀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라비엘리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봉투 겉면에는 낯선 필체로 분명히 제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누구지?’

그녀는 조심스레 밀봉된 봉투를 열었다.

‘친애하는 르휜 양에게.

나는 힐스의 의원으로 당신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다만, 내가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탓에 무례한 부탁을 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만약 지금 루시안 마이어와 함께 있다면, 그의 눈을 피해 꼭 나를 만나러 오십시오.

당신이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부디 안전하길 바랍니다.

니엘 페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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