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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09)화 (109/136)

109화

문이 열리자 바깥 공기와 함께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인은 황망한 얼굴로 손에 힘을 풀었다.

“……클라인 신관님.”

“오, 세상에.”

사제들은 안으로 들어선 직후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바닥은 검붉은 피로 흥건했다. 흰 사제복이 덮여 있었으나 핏자국이 번진 데다 한눈에 보아도 시신이 깔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제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한 번 마주 보았다.

“신관님, 설명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클라인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찼고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두 손에 힘을 가득 주고 말라버린 입술을 꼭 붙였다. 어금니를 세게 깨물며 느릿하게 숨을 내뱉는다.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지만-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신관님?”

눈꺼풀이 무거워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는 텅 빈 눈으로 레브리안을 바라보았다.

울다 그치길 반복한 가여운 얼굴….

‘신관님!’

‘레브리안.’

‘레비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레비라고 부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레브리안.’

‘싫어요, 레비라고 불러줘요.’

‘아니, 레브리안은 레브리안이지 레비가 아냐.’

‘그 이름은 남자아이 이름 같아서 싫은걸요.’

지금껏 제가 그녀를 지탱해왔다고 믿었다.

열다섯에 어머니를 잃은 가련한 소녀를 거두었다고, 신의 품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이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얼마든지 돕겠다. 그러니 전부 얘기해 보렴.’

‘신관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

‘결혼해야 한대요, 저.’

그저 가여운 아이라 정이 갔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자위하며 진심을 구긴 채 살아왔다.

지나친 상념에 영혼이 탁해졌다 느낄 때면, 클라인은 제 손목과 팔목에 상처를 내며 용서를 빌었다.

누구를 향한 용서였는가.

무엇을 위한 용서였는가.

클라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눈으로 레브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가 지금 바라는 건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녀의 미소를 다시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전부 다 설명 드리겠습니다.”

나를 레브리안을 사랑해.

거칠게 뛰던 박동도, 거칠던 호흡도 어느샌가 차분해져 있었다. 클라인은 차게 식은 눈으로 사제에게 말했다.

“…이자는 에몬 질입니다.”

익숙한 이름인 탓에 사제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에, 에몬 씨라고요?”

“에몬 씨가 대체 왜.”

“가벼운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꽤 많은 양의 약초를 부탁했습니다. 지급해야 할 돈이 절반가량 남아있는 상황에서.”

그때, 레브리안이 클라인의 팔을 붙잡았다.

“신관님.”

하지만 클라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기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몬 질은 제가 죽였습니다.”

서늘하고도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죽은 자도, 살아있는 자도 그저 침묵할 뿐.

끔찍하리만치 숨 막히는 적막을 깨뜨린 건 안경을 쓴 사제였다.

“클라인 신관님, 지금 하신 말씀이 전부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사제는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그러더니 예리한 눈빛으로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얼굴이 엉망이 된 하녀, 후작의 보호를 받는 몰락한 귀족 영애, 출신이 불분명한 사내까지.

어딘가 이상한 조합이었다.

“신관님, 다시 한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 전부 사실이십니까?”

“사실입니다.”

단호한 대답에 어디선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내내 침묵하던 루시안이 나른하게 목소리를 냈다.

“먼저 쏘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었을 겁니다.”

“뭐라고요?”

“저자의 품 안에 든 것을 확인해보시죠.”

루시안이 턱 끝으로 에몬을 가리켰다.

사제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가장 먼저 문을 열었던 사제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에몬을 덮은 신관복을 걷어내더니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윽.”

하지만 엎드린 채 쓰러져있어 품 안에 든 것을 확인하려면 시신을 뒤집어야 했다. 사제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루시안이 나섰다.

그는 태연히 걸어가 에몬의 어깨를 쥐고 앞으로 돌려세웠다.

“욱.”

사제는 구역감을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레브리안과 라비엘리 역시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은 태연히 제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그런 뒤 손수건을 쥔 채로 에몬의 재킷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가 에몬의 총을 내밀자 사제가 낮게 중얼거렸다.

“총이군요.”

루시안은 다시 에몬의 시신 위에 사제복을 덮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안경을 쓴 사제가 말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분들은 전부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사제의 말에 라비엘리는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신관님께서 나설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루시안은 처음부터 에몬을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만, 신관에게는 신전에서 벌어진 사건에 한해 면책권이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사제의 말에 클라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신관님의 승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일단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그 역시 꽤 괴로운 얼굴이었다.

분명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제대로 밝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클라인이 높낮이가 없는 음조로 말을 시작했다.

“신관의 죄에 면책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 죄를 아예 없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적정한 수위는 아마 대신관께서 정하실 겁니다.”

사제가 무겁게 대답했을 때였다.

“면죄를 받는 대신, 오늘부로 신관복을 벗겠습니다.”

“클라인 신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클라인 이온은 대신관 다음으로 뛰어난 신력을 가진 자였다.

신처럼 완벽하고 품위 있는 외형, 모두 그가 하비네스의 뒤를 이어 대신관이 될 거라 말해왔다.

“갑작스러운 말씀이로군요. 신관님, 지금… 신관님께서도 많이 당황스러우신 것 같은데 먼저 대신관님을 만나신 뒤에 결정하세요.”

“물론 죄질이 가벼운 건 아니지만.”

옆에 서 있던 다른 사제들도 나섰다.

“신관님, 사고사로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자가 먼저 위협했다면 정당방위로 종결지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클라인은 차분하고 침착한 얼굴이었다.

“성급히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고 이 옷을 계속 입을 수는 없어요.”

묵직한 진심에 방 안에 있는 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흔들리는 성정이라면 모를까, 클라인처럼 강직한 자일수록 단번에 부러질 확률이 높다.

여기서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내를 위해 기도할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클라인의 말에 사제들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시면 나오십시오.”

쾅.

다시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암흑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섣불리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클라인이 천천히 신관복을 벗어 소파에 내려놓자 루시안이 라비엘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돌려 루시안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자 클라인은 눈을 감았다. 이마에서 시작된 열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농담이시죠? 아니죠……?”

“…….”

“아냐, 아니라고 말씀해주세요. 신관복을 벗으신다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클라인은 레브리안을 돌아보았다.

“레브리안, 나는 네가 에몬 씨를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안다.”

“…….”

“나는 그자를 책망할 자격도 없는… 한심하고 멍청한 사람이라는 것도.”

“신관님.”

“총을 쏠 용기는 없었지만, 너를 위해 뭐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안 돼요, 신관님. 그러지 마세요, 제발!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제가 책임지고 싶어요.”

신관복을 벗은 클라인은 흰 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말없이 소매 단추를 풀더니 천천히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

자해를 반복하며 새겨진 자국. 그의 팔에는 상처가 생겼다 아문 흔적으로 가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느껴지는 듯해 레브리안이 입을 손으로 가렸을 때였다.

“이미 나는 파면당해 마땅한 인간이다.”

“신관님.”

레브리안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고통받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지금껏 진심을 속여 왔으므로… 더는 신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이다.”

“신관님, 아녜요. 이러지 마세요.”

불안하고 위험한 시선이 서로를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클라인은 그 순간, 저를 단단하게 둘러싸고 있던 무언가가 완전히 허물어졌음을 깨달았다.

“나의 맹세는 깨진 지 오래야. 내 마음은… 레비, 늘 네게로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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