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에몬은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단호하고도 잔인한 한 발이었다.
루시안은 에몬에게 짤막한 비명을 지를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뜨거워진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던 사내의 숨이 천천히 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
레브리안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마치 제게 다가오는 듯한 비릿한 냄새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 라비엘리가 그녀를 당기더니 머리를 감싸 안아주었다.
바닥이 천천히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오히려 즐거운 듯 입꼬리마저 씰룩였다.
“맙소사…….”
라비엘리는 레브리안을 끌어안은 채 뒤로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건 피가 치맛자락에 닿을까 두려워서일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전처럼 당황스럽지도 온몸이 벌벌 떨릴 만큼 두렵지도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요.”
라비엘리는 레브리안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고개를 들어 루시안을 쳐다보자, 그는 열기가 식은 총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저녁에는 무얼 먹지 정도를 고민하는 눈빛으로.
“이제 어쩔 셈이에요?”
여전히 레브리안을 껴안은 채 라비엘리가 물었다.
총소리가 났으니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선 달아날 수도 없어요. 신전에서 사람을 죽였으니 무사할 수 없을 거라고요.”
“내가 그 정도도 생각 안 했을까 봐.”
루시안은 라비엘리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라비엘리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냐고 물으려다 말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레브리안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그녀가 이토록 두려워하는데, 태연히 뒷일을 묻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차라리 눈을 뽑아버린다고 했을 때 말리지 말 걸 그랬나.’
라비엘리는 구멍 난 사내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때 말리지 않았다면 눈을 잃는 정도로 끝났을지 몰랐다.
‘아니, 동정하지 말자. 죽어도 싼 인간이야.’
에몬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43만 크랜을 준비할 여력도 없거니와, 만약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돈을 갚았다 하더라도 에몬은 포기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결국 레브리안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어쩌면 루시안의 선택이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법인지도 몰랐다.
그는 간단하게 에몬을 죽였다. 달래고 어르다 끝내 윽박지르고 분노하던 사내를 손쉽게 처리했다.
비열한 사내에게 가장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그 순간, 라비엘리의 머릿속에 사내가 흘린 피보다 선득한 기억이 떠올랐다.
‘라비엘리,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후작가의 마이어는 두 명이잖아.’
‘…….’
‘한 명을 죽일까요?’
물론 그때도 루시안이 실언했다거나 가볍게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사람을 둘이나 죽이는 걸 보았으니까.
지금껏 살면서 루시안만큼 솔직한 사람을 본 적도, 그만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래, 저 남자라면 정말 테아노 후작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돌연 섬뜩해졌다.
그것이 과연 해방일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루시안에게서 벗어나려 노력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심한 변태 성욕자와 능글맞은 살인마 중에 더 위험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때, 문이 발칵 열리더니 클라인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맙소사.”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는 허겁지겁 문을 잠갔다.
“설마 했는데.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클라인의 음성에 레브리안이 라비엘리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눈, 빨개진 코, 왼쪽 뺨은 피멍으로 얼룩진 가여운 얼굴이었다.
“레브리안.”
“……신관님.”
클라인을 마주한 레브리안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보다 그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사람이 죽었다는 건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혼란이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고통스럽고 두려웠으며 달아나고 싶었다.
클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사무실에서 벌어진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다.
“신성한 곳에서 이게 대체 무슨…….”
클라인은 침통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벽면에 걸려있던 사제복을 꺼내선 죽은 에몬의 위에 덮어주었다.
“사람을 죽인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아무리 이 자가 악인이라 해도, 살인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할 겁니다.”
클라인이 무거운 음성을 떨어뜨렸다.
그의 말에 여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분명 총성이 울렸을 것이고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찾을 겁니다. 게다가 제 사무실에서 일어난 일이니 제가 설명해야겠지요. 제 책임 역시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레브리안은 라비엘리의 품에서 벗어나 천천히 일어섰다.
에몬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새 피비린내에 익숙해진 덕분인지 처음보다는 조금 진정된 얼굴이었다.
여전히 두려웠고 혼란스러웠으나, 레브리안은 이제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당신 짓입니까?”
한참 만에 클라인이 입을 열었다.
그는 문가에 무심히 기대어 있는 루시안을 노려보았다.
클라인은 이 사내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정을 정돈하지 못하고 제게 지나치게 굴 때부터 언젠가 사고를 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모두를 곤란에 빠뜨리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되뇌었을 때였다.
“아뇨.”
레브리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했어요.”
당황한 클라인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레브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음조였다.
“죄송해요.”
“레브리안, 그게 무슨.”
“제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클라인은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레브리안, 거짓을 고하는 것 역시 무거운 죄다. 네가 발을 딛고 선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클라인은 레브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레브리안은 어딘가 공허한 눈이었으나 흔들림 없이 다시 말했다.
“죄송해요. 차라리 제가 죽었어야 했는데.”
“레브리안, 내 말은 그런 뜻이…….”
“신전의 규율과 법도에 따라 처리해 주세요.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더는 참지 못한 라비엘리가 나서려 했을 때였다.
클라인의 등 뒤에 서 있던 루시안이 검지를 세우더니 입술에 대었다.
‘쉿.’
설마 레브리안에게 살인을 뒤집어씌울 생각인 걸까.
라비엘리는 레브리안이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다 문득 사무실로 다시 돌아오며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났다.
‘에몬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렇다고 레비와 결혼하게 둘 순 없어요.’
‘내게 방법이 있어. 대신… 당신이 적당히 침묵해야 할 때를 알고 침묵한다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갈 겁니다.’
라비엘리는 몸에 힘을 잔뜩 줄 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지금이 침묵해야 할 때인지 몰랐다.
입술을 붙이고 루시안을 쳐다보자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레브리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네, 네가 어떻게 사람을… 네가 어떻게 사람을…….”
“달리 도리가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총은, 그럼 총은 어디 있지?”
클라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허겁지겁 물었을 때였다.
레브리안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루시안을 가리켰다.
“저분의 총을 빼앗아 제가 쐈어요.”
“거짓말!”
클라인은 숨을 몰아쉬며 루시안에게 다가갔다. 그는 루시안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악을 쓰기 시작했다.
“네 놈 짓이지, 다 알고 있어! 그래놓고 순진한 레브리안에게 대체 뭐라고 지껄인 거야! 당장 말해!”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거지?”
“뻔뻔한 자식 같으니!”
“잘 생각해 봐. 누가 진짜 뻔뻔한 새끼인지.”
루시안이 가볍게 클라인을 밀어내자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악을 썼다.
“이 나쁜 새끼! 죽여버리겠어!”
“신관님!”
레브리안이 클라인을 말리려 달려들었을 때였다.
똑똑.
“신관님, …신관님? 안에 계십니까?”
문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클라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총성을 조사하기 위해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저런, 이제 어쩐다.”
루시안은 그대로 오른손을 뒤로 뻗더니 문고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