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당신은 뭐요?”
에몬은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복잡해질 일이 아니었다.
대체 저 하녀가 뭔데 이렇게들 난리인가 싶다가도 아직 추측이긴 하지만 라비엘리와 혈연관계라는 걸 생각하면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헛소리는 거기까지 해. 더는 못 듣겠으니까.”
루시안이 한쪽 귀를 후비적거리자 에몬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뭐야?”
“헤르젠 루즐의 빚은 거기서 해결하는 게 맞지 않나?”
“제대로 못 들었어? 헤르젠이 제 딸년을 팔았다니까.”
에몬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품 안에 있던 서류를 다시 꺼냈다.
“그 한심한 새끼는 돈을 갚을 능력도 뭣도 없어. 오래전에 포기했다고. 그러니 내가 빚 대신 레브리안을 데려가는 게 맞는 절차야.”
에몬은 주먹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 자식은 또 뭐야?’
눈앞의 사내는 키가 몹시 크긴 했지만, 얼굴이 희고 체형이 날렵한 것이 쉽게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마음뿐이었으나 여차하면 저 빙글거리는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저런, 그런데 어쩌지.”
루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아가씨 그 도박꾼 딸 아닌데.”
“뭐?”
“돈이 걸려 있으면 잘 알아보고 했어야지.”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가 그런 거 하나 확인 안 했을까 봐?”
“도박꾼도 이미 알고 있어. 너 속은 거야.”
에몬은 얼굴이 새빨개져선 레브리안을 한 번 쳐다봤다.
“하, 이것들이…… 진짜 좋은 말로 하려니까.”
그 사이 라비엘리가 다부지게 말을 이었다.
“저 사람 말이 맞아요. 레브리안은 내 동생이에요. 이 아이는 루즐이 아니라 르휜가의 딸이라고요!”
“…….”
에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구깃거렸다.
“그게 대체 무슨.”
그저 먼 친척 정도일 거라 예상했는데 설마 라비엘리의 친동생일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에몬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몰락한 가문이긴 해도 무려 백작가였던 집안이 아닌가.
‘정말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럼 잘됐네. 르휜가에서 내 빚을 대신 갚아주려나?”
에몬은 라비엘리를 향해 빈정거렸다.
“아닙니까? 그 잘난 가문에서 좀 갚아주시죠. 귀한 자손이 엮인 일이니 깔끔하게 갚아주면 될 일 아닙니까?”
어차피 라비엘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갚아줄 능력도 없으면서 출신만 드러내면 내가 납작 엎드릴 거로 생각했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자, 르휜 양.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당신 동생을 팔아넘길 생각이 없다고요. 내가 얼마나 레브리안을 원하는지 르휜 양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내 동생 이름을 더러운 입에 함부로 올리지 말아요!”
“더러운 입이라니요. 정말 섭섭합니다, 르휜 양.”
그때, 루시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에몬은 그를 노려보며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건방진 새끼, 감히 웃어?
“거기까지 해. 못 오를 나무 쳐다보다 목 꺾이지 말고.”
“……이 새끼가.”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 까부는 꼴에 부아가 치밀었다.
게다가 여기서 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루시안의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어놓고 싶었지만 라비엘리와 함께 다니는 걸 보면 분명 테아노 쪽 사람 같았다.
공연히 건드렸다가 테아노의 노여움을 살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았다.
에몬은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무튼, 난 그런 거 몰라. 출신이 뭔지는 전혀 관심 없고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이야. 난 그저 빚 대신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이제 제삼자는 그만 빠져! 피곤하니까.”
말하다 보니 화가 치밀어서 결국 짜증을 내고 말았다. 에몬이 씩씩거리며 레브리안을 향해 걸어갔을 때였다.
철컥.
“대화 중에 왜 등을 보여, 건방지게.”
뒤통수에서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놀란 라비엘리의 표정 덕분에, 에몬은 돌아보지 않고도 그것이 총을 장전하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에몬은 천천히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 문가에 나른하게 기대 있던 사내가 권총을 제게 겨누고 있었다.
“에몬이라고 했나?”
에몬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루시안이 총을 쥔 모습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에몬은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장사꾼이었다. 총은 그가 납품하는 물건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다.
누군가 총을 집었을 때 그저 호신용으로 총을 들고 다니는지, 경험도 없는데 허세를 부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사수인지 정도는 총을 쥔 모양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무심한 얼굴로 총구를 제게 겨누고 있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자세만으로는 그의 실력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호신용으로 그저 들고 다니는 총일 거라 생각했는데 총구 모양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젠장.’
총구 끝이 매끈했다면 지금처럼 긴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러 번, 아니…… 꽤 오랫동안 써온 총이 분명하다.’
탄환이 발사되며 남긴 열기로 총구는 녹았다 붙은 흔적이 그득했다.
“이, 이봐, 왜 이래?”
에몬은 목소리를 다소 누그러뜨리며 고개를 슬쩍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여기 신전이야. 설마 이 신성한 곳에서 그걸 쓸 생각은 아니지?”
그러자 루시안은 에몬의 머리를 따라 총구를 움직이며 말했다.
“왜, 안 돼?”
“시, 신전에서 감히 총을 쐈다간……!”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자 루시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알기로는 신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면죄부가 주어지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면죄부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줄 알아?”
에몬의 목소리가 커지자 루시안의 얼굴이 다시 싸늘해졌다.
“그래서?”
“이봐, 일단 총은 내려놓고 말로 해. 이거, 너무 삭막하잖아. 대, 대화로 풀자고.”
함부로 총을 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하고 두려운 건 사실이었다.
일단 총을 내려놓게 해야 한다.
에몬은 사내가 객기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내가 자세히 설명을…….”
루시안은 에몬의 말을 뚝 자르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어디서 좀 화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새끼가 너랑 닮았거든.”
“……?”
“널 대신 쏴도 될까?”
“그,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에몬은 당혹스러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 새끼랑 너랑 상관없든 말든 내 알 바 아냐. 난 그저 지금 누군가를 쏘고 싶을 뿐이거든.”
그러더니 처음으로 정갈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순간 에몬은, 저 미친 사내가 정말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정하고 말로 해. 내, 내가 사람을 알아볼게. 그 사람이 누군지 내가 알아봐 줄 테니……!”
“더는 말하기 싫다더니.”
“그건 내려놓고 좋게 말로 하자고. 응?”
에몬의 말에 루시안은 총구 끝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그러더니 메마른 음성으로 에몬에게 말했다.
“꺼져.”
“아, 알았어. 그럴게.”
물론 에몬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문밖으로 나가서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저 갈색 머리 사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것이다.
감히 내게 총을 겨눠?
에몬 역시 품 안에 총이 있었다. 물론 지금 총으로 그를 쏠 생각은 없었다. 공연히 신전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총을 뒤통수에 댄 뒤에 장전하는 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겁에 질려 제게 무릎을 꿇을 때까지 봐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뒤에 사람을 써서 죽일 것이다.
“이만 나가지, 나갈게.”
에몬은 손을 든 채 슬금슬금 옆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루시안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사내가 긴장을 늦추는 순간을 노릴 계획이었다.
“저…… 그나저나 여기 계신 르휜 양과 내가 아주 잘 아는데 말이야.”
에몬은 부러 라비엘리를 입에 올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자네 혹시 마이어가와 연이 있는 사람인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사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나도 마이어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거든. 자네와 내가 굳이 이럴 필요는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에몬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을 때였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
루시안이 에몬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어딘가 괴괴한 웃음이었다.
“내가 누군지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밝혀선 안 된다고 했는데. 어쩌지?”
“그게 무슨.”
“알면 너 죽어야 해.”
“뭐?”
바로 그때, 루시안이 순식간에 미소를 거두었다.
“미안, 말하고 싶어졌어.”
“이, 이봐.”
“……테아노 마이어 아들이야.”
찰나의 순간이었다.
탕!
총구가 불을 뿜더니 뜨거운 연기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