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등 뒤에서 들려온 고함에 에몬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문을 연 것은 루시안과 라비엘리였다.
“레비!”
라비엘리는 바닥에 쓰러진 레브리안을 보고 놀라 뛰어갔다.
레브리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된 데다 왼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오, 세상에. 레비……!”
불쾌한 감정이 화산처럼 치솟아 올랐다. 레브리안의 가여운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라비엘리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흑, 흐윽.”
레브리안은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악몽 같은 시간이 끝난 것은 아니었으나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감정이 요동쳤다.
라비엘리는 바들바들 떠는 레브리안을 끌어안으며 소리 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 사이, 에몬은 옆으로 물러서서 제 옷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짜증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래?’
라비엘리가 여기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마치 뭐라도 된 양 레브리안에게 달려간 것도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측은해서 그랬다기엔 너무 과한 반응이었으니까.
“아, 르휜 양.”
에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한 번 숙였다 들며 라비엘리를 마주했다.
그녀가 제게 뭐라든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임은 분명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테아노 마이어 후작이 뒤를 봐주고 있는 여인이 아닌가. 지금에야 후견인이라지만 결국 테아노는 그녀와 결혼할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그저 관상용으로 데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후작 부인이 되는 것인데 괜히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저런, 이 하녀를 알고 계시나요?”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라비엘리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오우.”
에몬은 라비엘리의 이런 모습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늘 무기력한 얼굴로 책을 읽거나 먼 곳을 응시하기만 했다.
천천히 뜯어보면 몹시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잔뜩 성이 난 고양이처럼 제게 발톱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가만…….’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몬은 묘한 생각을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내 눈이 어떻게 됐나 싶을 정도로 닮았어.’
하지만 이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치부하며 다소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르휜 양,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꼭 죽을죄라도 진 것 같군요. 피해자는 전데 말입니다.”
“뭐라고요? 피해자?”
“르휜 양, 죄송하지만 저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답니다. 그러니 상관없는 사람은 좀 빠져주시면 좋겠군요.”
에몬의 말에 레브리안은 저도 모르게 라비엘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라비엘리는 그녀의 등을 도닥이며 에몬을 노려보았다.
“아뇨,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면 지금 말하세요. 제가 있는 곳에서.”
“저런, 귀한 분께서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모르겠군요. 르휜 양을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고 후작님께 혼이 날까 겁이 납니다만.”
에몬은 부러 테아노 후작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라비엘리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상관없으니 지금 말해요. 해결해야 할 일이 뭐죠? 그게 대체 뭐길래 사람을 때려요!”
목소리 끝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그 사이 레브리안의 뺨은 더 심하게 부어올랐다. 핏줄이 터졌는지 얼룩얼룩 피멍이 잡히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때릴 수가 있어요!”
설마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해서였을까.
라비엘리는 조금 전 루시안을 말린 것을 후회했다.
클라인의 얼굴에 주먹질이라도 하게 놓아둘걸!
“그럴 일이 있었다니까요. 아니,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왜 사람을 그렇게 몰아가십니까?”
에몬은 억울하다는 손짓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 아가씨는 제 아내예요, 르휜 양.”
“뭐라고요?”
라비엘리가 비틀린 음성을 내자 에몬이 다정하게 덧붙였다.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로튼으로 돌아가면 바로 진행할 겁니다.”
“아냐, 아니에요!”
레브리안이 거칠게 항변했다. 그러자 라비엘리는 레브리안을 도닥이며 매서운 목소리를 냈다.
“이봐요, 다 알고 있으니 허튼소리 하지 말아요.”
“다 알다니요.”
“당신이 레브리안에게 청혼했다는 거 들었어. 하지만 내가 당신 같은 저질 쓰레기와는 절대 결혼해선 안 된다고 말했어요.”
“뭐라고요?”
“지금까지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라비엘리는 격해진 감정 탓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일부러 돈을 갚지 못할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터무니없는 이자로 사람들을 괴롭혀 왔죠. 빚을 갚지 못하면 아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노예로 팔아버리는 사악하고 나쁜 새끼라는 거 레비와 내가 모를 줄 알아요?”
그녀가 말할수록 에몬의 표정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면면에 적당한 미소를 그려 넣고 장사꾼으로 사람을 대할 때의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바이젤 루오가 악마를 불러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건 잘못된 일이었지만 난 그를 이해해요. 당신은 악마보다 더 사악하고 끔찍한 사람이야.”
거기까지 말한 라비엘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폭언을 쏟아낸 것은 처음이었다.
라비엘리는 늘 제 감정을 가슴 한쪽에 쌓아두기만 했으니까.
“절대, 우리 레브리안을 당신 같은 사람과 엮이게 두지 않을 거예요.”
라비엘리의 마지막 말에 에몬이 콧잔등을 씰룩였다.
“우리 레브리안?”
그러고는 빤히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 이런. 세상에.”
두 사람, 소름 끼칠 만큼 닮았다 했더니 설마.
그런데 한 명은 왜 여기서 하녀처럼 지낸 거지?
헤르젠 루즐은 대체 누구고.
에몬은 상황이 전부 정리된 건 아니었으나 일단 표정을 풀었다.
“설마 했더니…… 아니, 르휜 양. 정말 우리 레브리안이랑…….”
먼 친척이라거나 혈연관계인 건가?
에몬이 뒷말을 다 잇기도 전에 라비엘리가 말을 잘랐다.
“알았으면 인제 그만 나가줘요.”
라비엘리는 천천히 레브리안을 일으켜 세웠다. 레브리안은 다소 진정된 듯 보였으나 여전히 침통한 얼굴이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그럴 수는 없답니다, 르휜 양.”
에몬은 일이 재미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냐면 레브리안과 내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게 있거든요.”
그러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종이를 집어 들어 라비엘리에게 내밀었다.
“레브리안의 아버지가 내게 신세를 좀 졌어요. 뭐 르휜 양에게는 가벼운 수준이긴 합니다.”
그때, 라비엘리의 머릿속에 레브리안의 아버지가 에몬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게 얼마인지 말해봐요.”
“빚이 23만 크랜, 여태 갚지 못한 이자가 10만 크랜, 돈 받으러 왔다 갔다 하면서 개고생시킨 비용이 5만 크랜, 시간 낭비한 비용이 3만 크랜, 사람 풀어 잡으러 다닌 게 5만 크랜. 그래서 총…… 43만 크랜입니다. 소소하지요?”
라비엘리는 다소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러자 레브리안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나쁜 자식,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워워, 이러지 마, 레비.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니까.”
그러더니 라비엘리를 향해 나른히 웃어 보였다.
“이 돈 못 갚으면 하나뿐인 자식도 팔겠다고 서명한 건 레비의 아버지지 제가 아닙니다, 르휜 양.”
에몬이 내민 서류에는 그가 말한 내용뿐 아니라 헤르젠 루즐의 이름과 지역 법원 판사의 서명까지 선명했다.
“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 아닙니다. 물론 아버지는 레비를 시장에 내다 팔든, 노예로 쓰든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아니, 사람이 또 어떻게 그런답니까?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거예요.”
그는 손에 든 것을 느릿하게 반으로 접으며 말을 이어갔다.
“얼마나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까? 그런데…… 빚도 갚지 않겠다,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우기니 제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안 그래요, 르휜 양?”
에몬은 망연자실한 얼굴의 두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서늘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 43만 크랜을 갚아줄 거 아니면 잠자코 계세요.”
“당신……!”
더는 참지 못한 라비엘리가 발끈했을 때였다.
“헤이.”
그때까지 문가에 기대서 있던 루시안이 고개를 반대로 틀었다.
“거기서부턴 나랑 얘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