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을 때, 라비엘리는 멀리서 걸어오는 클라인을 발견했다.
“신관님.”
클라인 역시 라비엘리와 루시안을 보고 다가왔다.
“두 분 여기 계셨군요.”
그는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기력 없는 얼굴에 눈동자는 음울했다.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루시안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 신관의 얼굴을 날려버리겠다며 살기 어린 목소리를 낸 것이 떠오른 탓이다. 행여 루시안이 실수라도 할까 봐, 라비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브리안은… 전부 이야기했나요?”
라비엘리가 묻자 클라인은 조금 전보다 더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아뇨, 자리를 비워달라기에 잠깐 나왔습니다.”
“뭐라고요?”
그 순간 루시안이 비틀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라비엘리가 급히 그의 팔을 잡았지만, 이어진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리를 비워달라는 게 설마 에몬이 한 말은 아니길 빕니다.”
클라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썹을 주춤거리며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안으로만 삼킬 뿐.
“신관님, 그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클라인의 대답에 루시안이 두 손을 들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저라면 사무실에 두 사람만 두지 않았을 겁니다.”
클라인은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사제복 안에 숨긴 마음이 요동친다. 더는 이대로 있지 말라고 더는 참지 말라는 생각이 끝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건 생각일 뿐, 클라인은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부러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이건 루시안이 아닌 성난 제 가슴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레브리안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건 맞지만 내가 그 아이의 보호자는 아닙니다. 레브리안도 제 인생을 책임지고 결정할 권리가 있어요.”
“제 인생을 결정할 권리라.”
“…….”
“그게 빚쟁이한테 팔려 가는 겁니까?”
“…….”
“설마 돈이라도 많은 쓰레기와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루시안.”
보다 못한 라비엘리가 루시안을 만류했다. 그러고는 클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신관님.”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가 나서죠. 레브리안 루즐 양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그 가족한테 꽤 든든한 후원자도 있으니.”
루시안은 클라인을 노려보더니 라비엘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곧장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홀로 남은 클라인은 망연한 얼굴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루시안이 남긴 말은 마치 형별처럼 남아 그를 짓눌렀다.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라비엘리가 루시안에게 물었다.
“대체 신관님께 왜 그래요?”
“뭐가요?”
“너무 지나치잖아요. 그분이 뭐라고. 신전에 데리고 있으면서 아무 연고도 없던 레비를 지금까지 잘 돌봐주신 건 맞잖아요.”
루시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여튼 눈치 없다니까.”
“뭐라고요?”
“저 사람이 지금 신관으로 보입니까?
알 수 없는 말에 라비엘리가 눈에 의문을 가득 품었지만, 루시안은 슬슬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난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루시안은 슬쩍 고개를 돌려 클라인이 서 있는 곳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에 빠진 한심한 남자일 뿐이라고요.
* * *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레브리안이 되묻자 에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못 들었어? 네 아비가 너 팔았다고.”
“아뇨, 그럴 리.”
가까스로 한마디를 덧붙였으나 그게 전부였다.
사내가 입 밖으로 낸 것이 너무 황망해서, 그의 표정이 공포스러워서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레브리안은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금니를 잘근잘근 씹는 일뿐이었다.
“네 표정 보니까 진작 말해줄 걸 그랬네. 얌전 빼는 얼굴보다 지금이 훨씬 나아.”
에몬은 비열하게 웃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오늘 결판을 보려고 준비해왔다. 레브리안이 순순히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면 굳이 내보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가져오길 잘한 일이었다. 에몬은 꺼내든 종이를 펼쳐서는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팔려 가기 싫으면 네가 갚아.”
레브리안이 하얗게 질린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자 에몬은 적힌 내용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빌려 간 돈이 23만 크랜, 이자가 10만 크랜, 돈 받으러 왔다 갔다 하면서 나 개고생시킨 비용이 5만 크랜, 시간 낭비한 비용이 3만 크랜, 사람 풀어 잡으러 다닌 게 5만 크랜. 그래서 총…… 43만 크랜. 어때, 깔끔하지?”
“이건 말도 안 돼요.”
레브리안은 종이를 내려놓으며 항변했다.
“빌린 돈이 23만 크랜인데 어떻게 43만을 갚으란 거예요?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년이 제 아비 닮아서 아주 뻔뻔하네. 돈 빌려 가놓고 튀어서 잡으러 다닌 게 얼마인지 알아? 그 시간에 내가 일을 했으면 얼마를 버는데? 그러니 당연히 청구해야지.”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잖아요.”
“됐고, 어쨌든 이 돈 못 갚으면 레브리안 루즐을 팔겠다고 서약했어. 그 아래에 네 잘난 아비의 서명 보이지?”
“말도 안 돼.”
“이게 얼마나 무섭고 큰돈인 줄 알아? 너 시장에 내다 팔아도 못 갚는 돈이야. 힘도 약한 계집애를 하녀나 창부로밖에 더 쓰겠어? 많이 쳐줘 봐야 5만이야.”
“…….”
레브리안은 종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졌고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여기서 정리할 짐이랄 게 있나? 그래봐야 쓰레기 같은 치마 쪼가리가 전부 아냐? 그만 일어나. 나 바쁜 사람이야.”
“아니, 안 돼.”
울음 섞인 음성으로 레브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에몬은 냉정한 얼굴로 일어서더니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거 놔요!”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왔어야지!”
붙잡힌 손목은 마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뜨겁고 고통스럽고 아팠다. 에몬은 레브리안을 끌어내더니 문가로 향했다.
거친 힘에 무력하게 일어서고 말았지만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레브리안은 이를 악물고 거세게 반항했다.
“놔! 이거 놓으라고!”
“이년이!”
더는 참지 못한 에몬이 레브리안의 뺨을 세게 갈겼다.
“아악!”
레브리안은 휘청이더니 고꾸라지고 말았다.
얻어맞은 뺨에서 욱신욱신 박동이 뛰었다. 대범하게 굴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뺨에 대었다.
얼굴에 있는 혈관이 터졌는지 끔찍한 통증이 이어졌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발갛게 부어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레브리안은 그제야 에몬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다른 길은 없었다.
차디찬 마룻바닥에 쓰러진 제 모습이 바로 현실이었다.
“후…….”
에몬은 몸을 낮추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홧김에 손을 댔는데 주저앉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처음보다는 풀어진 얼굴을 했다.
“좋을 말로 할 때 갔으면 좋았잖아.”
한 대 걷어 올리고 나니 차올랐던 화가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에몬은 제 손바닥을 조물조물하며 말을 이었다.
“판사 서명까지 받은 완벽한 문서야. 싫어? 그럼 43만 크랜을 내. 이런 식으로 울고불고한다고 널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레브리안은 숨을 몰아쉬며 에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반질반질한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좋아, 그래……. 후유.”
에몬은 제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호흡을 골랐다. 그러고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레브리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는 내가 너무 흥분했어. 널 아주아주 오래 기다렸는데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에 잠깐 이성을 잃은 것 같아.”
그는 처음보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레브리안에게는 여전히 지독하게 들릴 뿐이었다.
“시작부터 이러고 싶지 않아. 나는 분명 네게 약속했어. 너를 아껴주고 잘 대해주겠다고. 귀한 대접을 받고 싶다면 그리해준다고 말이야. 천한 신분에 하녀로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주제인 걸 잊지 마. 대저택에서 마님 소리 듣고 살게 해준다고 했잖아. 너 같은 것들이 꿈이나 꿀 수 있을 것 같아?”
“…….”
“지금이라도 내 손을 잡으면 오늘 일은 전부 없었던 것으로 해주지. 어때, 레브리안.”
물론 허공으로 사라질 43만 크랜이 조금 아깝기는 했다.
하지만 그 돈이 있어도 레브리안 같은 여자는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다.
에몬은 바닥을 짚고 있던 레브리안의 손을 붙들었다. 차갑게 식은 희고 아름다운 손.
그녀의 손을 제 얼굴에 가져가 냄새를 맡으려는 순간이었다.
“퉤!”
레브리안이 제 손을 빼내며 에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미친놈. 너랑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겠어.”
질끈 눈을 감았던 에몬이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핏발이 흉흉하게 서 있었다.
“이 망할 년이!”
에몬이 레브리안의 멱살을 움켜잡았을 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발칵 열렸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