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사무실 밖으로 나온 이후 라비엘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
한동안 그녀와 함께 침묵을 지키던 루시안이 갑자기 빠르게 두어 걸음 걷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
라비엘리는 걸음을 뚝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걱정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요?”
머리끝까지 차오른 긴장감과 불안에 공연히 퉁명스레 대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곧바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라비엘리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많이요. 아주 많이 걱정돼요.”
그녀의 눈에 레브리안은 아직 너무 어리고 연약한 소녀였다.
그에 반해 에몬은 산전수전 다 겪은 장사꾼이었다.
감언이설로 그녀를 구워삶아 결국에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할까 봐, 레브리안이 그에게 맞서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저를 키워주지도 않은 이름만 아버지인 사내의 빚이 아닌가.
도박 빚을 갚지 못해 어떻게 되든, 그건 결국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모질게 끊어내지 못하는 레브리안이 가엽고 안타까웠다.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라비엘리가 음울하게 중얼거리자 루시안이 묘한 말을 했다.
“이제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어요?”
“그게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를 곁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을 알겠느냐고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뭐라고요?”
“딱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두고 보는 심정이에요.”
“난 레비와는 달라요.”
“그렇게 부르니 좋군요.”
루시안은 나른히 웃더니 다시 옆으로 비켜섰다.
처음보다는 한결 얼굴이 풀린 라비엘리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루시안이 있어 조금은 든든했다.
강한 어조로 레브리안을 만류한 것도,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 것도 시원했다.
더하여 클라인을 책망한 것 역시 저는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조금 전에 나 대신 화를 내줘서 고마웠어요.”
라비엘리는 무심한 듯 용기를 냈다.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더라면 더 할걸. 나 욕 잘하거든요.”
“뭐라고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다시 들어갈까요?”
“됐어요.”
라비엘리가 눈을 찌푸렸지만 루시안은 이미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다시 가려고요. 수수방관한 신관도, 쓰레기 새끼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요.”
루시안은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더니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제발요 그만 해요.”
라비엘리가 놀라 그를 쫓았지만 루시안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만, 그만 해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에요?”
“당신 동생이 남은 인생을 망칠 뻔했는데 나보고 가만두라고요?”
“됐어요, 망치지 않았으니 이제 됐다고요.”
“감히 당신 동생을 넘봤으니 눈을 뽑아버리겠어.”
라비엘리는 기겁하며 그를 붙들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참아요, 제발!”
“하지만 그 새끼보다 더 짜증 나는 건 고고하게 앉아서 방관하고 있던 신관이에요.”
그는 섬뜩한 말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걷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잘난 신관 얼굴에 주먹이라도…….”
“루시안!”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라비엘리의 머릿속에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간 사냥꾼의 잔상이 스쳐 갔다.
더하여 장총을 들고 있음에도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은 사내도 떠올랐다.
이대로 두었다간 정말 사고를 칠지도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정말 품 안에서 권총이라도 꺼낼 것만 같았다.
루시안을 말려야 했다.
“루시안, 제발!”
라비엘리가 매달리듯 루시안의 팔을 붙잡은 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마치 그에게 달라붙어 안긴 꼴이 되고 말았다.
루시안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더니 가만히 라비엘리를 내려다보았다.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지러이 엉겨 붙는다. 라비엘리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고, 루시안은 오히려 눈꺼풀을 조금 내렸다.
마주하는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격한 반응 탓에 가빠진 호흡이 서로에게 전부 전달될 만큼.
라비엘리가 손에 힘을 풀고 멀어지려 하자 루시안이 돌연 라비엘리의 등허리를 받쳤다.
꼼짝없이 그에게 밀착된 탓에 라비엘리가 숨을 참았을 때였다.
“꼭 이렇게 해야만 내 이름을 불러줄 겁니까?”
라비엘리는 집요한 시선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당신은 진짜 미쳤어.”
공연히 치맛자락을 두어 번 털어내자 루시안은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참에 연기라도 하지 그래요? 연극이든 오페라든 꼭 하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보러 와준다고 약속하면.”
“여기서 실컷 보는데 내가 굳이 갈 필요가 있나요?”
라비엘리가 매섭게 쏘아붙이자 루시안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공연은 이쯤하고 우리 앞에 가서 기다리죠. 어때요?”
* * *
“미안해요.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레브리안이 그리 말하자, 사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는 차마 에몬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가 밖에서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나쁜 짓을 했든 어쨌든 지금은 그저 사랑을 갈구하는 한 남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청혼을 거절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건 마음을 짓밟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레브리안은 거절의 말을 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에게 부탁을 하면 레브리안은 제 상황은 생각지도 않고 우선 승낙부터 했다.
상대가 저 때문에 상처받는 것보다 차라리 제가 힘든 게 나았다.
물론 지금은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제 인생이 통째로 걸린 일이었다. 단순한 부탁과 거절, 요청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용기를 완전히 긁어모아 한 말이었다.
“뭐라고요?”
에몬이 비틀린 음성으로 한 번 더 되묻자 레브리안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행여 울음을 터트리거나 매달리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에몬의 반응은 레브리안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지금…… 나와 결혼을 못 하겠다고 했어요? 나와?”
에몬의 커다랗고 두툼한 귀는 완전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색은 크게 변함이 없는데 귀와 목만 빨개진 것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죄송해요.”
레브리안은 여전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중얼거리듯 사과했다.
“아, 지금 이해가 안 되는데. 왜? 왜죠?”
에몬의 음성은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은 사라지고 서늘함마저 감돌았다.
“……미안해요.”
에몬은 이유를 알고 싶어 했지만 사실 그에게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이 너무 형편없는 사람이라 안 될 것 같다고, 끔찍한 짓을 벌였다는 걸 알면서도 결혼할 수는 없노라고.
돈이 전부인 사람과 남은 인생을 그리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하, 진짜 웃긴 년이네.”
그 직후 이어진 말에 레브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레브리안은 제가 무언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에몬 씨.”
“결혼을 할 건지 안 할 건지는 사실 이미 정해졌어. 그냥 기분이라도 좋으라고 너한테 시간을 준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돌아앉아 있었는데, 레브리안이 처음으로 에몬을 제대로 마주했다.
“야,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
“그러니 주제에 맞지 않는 대접을 받았으면 감사히 여겼어야지.”
“…….”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네가 진짜 뭐라도 된 줄 알았어? 하녀 주제에 어디서 건방지게.”
“에몬 씨.”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는데, 조금 전 앉아 있던 사람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 같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왈칵하고 가슴이 울렁였다. 얼굴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브리안은 어금니에 세게 힘을 주고 울음을 참아냈다.
여기서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정말 더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많이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정말 죄송해요. 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혼은 너무 중요한 일이고 이렇게 결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전부 제 문제에요. 그러니 너무 노여워하지…….”
목까지 차오른 울음을 누르고 말을 이어가던 차였다.
“야.”
에몬이 레브리안의 말을 뚝 잘라먹었다.
그러고는 목 바로 아래까지 채워졌던 단추를 하나 풀며 차게 말했다.
“네 아비가 진작에 너 팔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