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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03)화 (103/136)

103화

“안녕하세요, 신관님.”

문을 연 직후 에몬은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마주하자 잠시 멈칫하였다.

‘뭐야?’

클라인의 사무실에는 레브리안이 있었다.

거기다 옆에는 마이어가에 있어야 할 라비엘리 르휜이,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사내가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레브리안을 처음 봤을 때 라비엘리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니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아니, 그나저나 르휜 양은 왜 여기 있는 거지?’

테아노 후작이 데려왔나 싶었지만 그건 분명 아닐 것이다. 에몬은 테아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더하여 저를 빤히 응시하는 사내의 시선이 몹시 거슬렸다.

“아, 이런. 손님이 이렇게 많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에몬이 레브리안을 향해 눈짓을 한 번 보낸 뒤 클라인에게 말할 때였다. 라비엘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르휜 양, 여기서 뵙습니다.”

에몬은 라비엘리에게 친절히 말하며 인사했다.

“네.”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아니,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신전에는 무슨 일로.”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관님.”

라비엘리는 에몬의 질문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루시안의 팔을 슬쩍 붙들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일어설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에몬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지 꼼짝하지 않았다.

“이만 가요.”

라비엘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결혼에 관한 말이 정리되길 바랐다.

레브리안도 클라인이 있는 자리라면 말을 꺼내는 게 더 나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마음이 급해진 라비엘리가 음성을 지그시 누르며 루시안을 불렀다.

“루시안.”

루시안은 그제야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레브리안을 돌아보았다.

“지금 말해요.”

그러고는 문 앞에 서 있는 에몬을 지나쳐 문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자 에몬은 그제야 어색하게 당겼던 입매를 풀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더니 레브리안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에몬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레브리안을 마주했다.

탐스럽고 윤이 나는 금발 머리- 클라인이 부탁한 약재를 찾아다니는 동안에도 늘 생각했던 아름다운 자태였다.

‘레비, 나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에몬은 클라인이 요청한 약재를 찾아다니는 동시에 레브리안의 어머니와 그녀의 출신에 관해 알아보았다.

얼마 전 젊은 신관이 흘리듯 남긴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원래는 다른 색이었다면요?’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꽤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라비엘리에게 반해 그녀와 비슷한 외모를 찾았다. 그런데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닮은 여인을 발견하자 이제는 정통성을 따지게 된 것이다.

‘레비, 아마 들으면 깜짝 놀랄 겁니다.’

그가 알아낸 건 헤르젠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란 사실이었고,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들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가 갑자기 생긴 건 과거 헤르젠이 살던 마을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전하면 몹시 괴롭고 우울해할 테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다.

공중에 뜬 것처럼 우울해질 테니 그 틈을 제가 잘 메워주면 될 것이다.

에몬은 이 사실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적당히 때를 보았다가 이용할 생각이었다.

“에몬 씨,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클라인의 음성이 에몬의 사고를 방해했다. 에몬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기울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아, 전에 말씀하셨던 물량을 드디어 맞췄습니다.”

에몬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품 안에서 영수증을 꺼냈다.

“아마 제국에서 저만큼 빨리 이 많은 양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쭐거리는 와중에도 에몬은 연신 레브리안을 힐끗거렸다.

마치 귀족 집안의 영애라도 된 양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이 오히려 에몬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클라인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달려들어 끌어안고 싶었다. 소파에 눕히고 낡은 치맛단을 전부 뜯어버리고만 싶었다.

‘오늘은 모든 걸 끝내야지. 언제까지 기다려줄 수는 없어.’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에몬이 두 손을 맞비비는 동안 클라인은 건네받은 영수증과 목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약재는 어디에 있습니까?”

“네, 전부 마차에 있으니 말씀하시면 가져오겠습니다.”

그 말인즉 나머지 대금을 달라는 뜻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클라인은 책상 서랍에서 지난번 계약금을 내고 받은 영수증을 확인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물건을 확인한 뒤 남은 대금을 지급하겠습니다.”

“네, 신관님.”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된 분위기였다.

클라인이 책상에서 영수증과 다른 서류를 정리하는 사이, 에몬이 오른손으로 입가를 한 번 훔쳐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슬그머니 기울이며 레브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어…… 레브리안. 그동안 잘 지냈어요?”

에몬의 음성이 제게 향하자 레브리안은 조금 놀랐는지 주춤거렸다.

“네.”

“아, 다행이네요. 당신이 잘 지냈다니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사실 조금 걱정했거든요.”

그는 천진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몬은 다부진 체격에 타고난 강골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을 가진 탓에 특유의 넉살이 느껴졌다.

지금처럼 서글서글하게 웃을 때면 라비엘리가 말했던 극악무도한 짓을 한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셨군요.”

“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네요. 잘 지낸 거 맞아요? 일이 조금 힘들었어요?”

거기까지 물은 에몬은 클라인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레브리안은 이제 말해야 할 적기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음성이 들리자 클라인은 책상을 앞에 두고 굳어버린 듯 가만히 있었다.

공연히 레브리안의 시선을 분산시키거나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 에몬이 클라인을 불렀다.

“저 신관님.”

“네.”

“여기 레브리안과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죄송하지만 자리를 좀 비켜주실 수 있습니까?”

클라인은 레브리안이 앉아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부진 눈빛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죠.”

“고맙습니다.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클라인은 두 사람이 앉은 소파를 지나쳐서는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이 남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에몬 씨.”

“아, 그래요. 사실 나도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레브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에몬이 불쑥 나섰다.

“이제는 당신이 대답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하녀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준 것이 문제였다.

충분히 귀한 대접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이긴 했다.

그런 생각으로 딴에는 배려한 것이었는데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나는 오늘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레브리안.”

에몬은 초조한 얼굴을 지어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이미 대답은 정해졌다.

하겠다, 하지 않겠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관이 있는 자리에서 대답한다면 더 좋았을 텐데. 다시 들어오라고 할 걸 그랬나?

그렇지 않아도 젊고 잘난 신관의 눈빛이, 태도가, 레브리안을 ‘레비’라고 부르며 친분을 드러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결혼을 공고히 하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한참을 우물거리던 레브리안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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