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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02)화 (102/136)

102화

“렉토르 양, 그럼 편히 쉬세요.”

“네.”

메이지가 문을 닫고 나가자 마우드는 제 발아래 놓인 가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물소 가죽으로 만들어 100년은 거뜬하다고 했는데, 어쩐지 저택 안에서 보니 귀퉁이가 헤진 것이 볼품없어 보였다.

“싸구려 사다 줘놓고 사기 친 거 아냐?”

에몬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 생각한 마우드는 발끝으로 가방을 툭 밀었다.

그 순간 반질반질한 에몬의 이마가 생각났다. 그러자 속이 뒤집히며 고고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내가 여기 들어앉아 있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네.”

에몬이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에몬이 제 종착지가 되었으면 했다.

좋은 남편이, 좋은 아버지가 되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저를 굶기지는 않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마우드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혹독한 유년기를 보냈다. 살아남는 방법은 지독한 삶보다 더 독해지는 방법뿐이었다.

“뭐 여기 광경도 크게 나쁘지는 않네.”

창가로 다가간 마우드는 닫힌 창문을 열어젖혔다.

저택의 웅장함만큼이나 거대하고 화려한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다.

“좋다.”

홀린 듯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씨앗처럼 작았던 욕망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 나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던 마우드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방 안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침대로 걸어가 벌러덩 누웠다.

“아, 좋다.”

침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상상 이상으로 폭신했고 시트는 몹시 깨끗했다.

먼지 하나 없이 관리된 것으로 보아 집사가 얼마나 사용인들을 닦달하는지를 대충 알 것 같았다.

“깐깐한 노인네로군.”

예상했던 것보다 무리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만약 테아노가 버티고 있었다면 조금 까다로웠을 것이다. 역시 들어앉으려면 빈집을 터는 게 제격이라고 중얼거리며 마우드는 깔깔 웃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한담.”

속 편하게 깔깔거렸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마우드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볼록하기는커녕 오목하게 들어간 배를 만지작거렸다.

“좋은 생각이긴 했어. 이제부터가 문제라서 그렇지.”

우선 저택에 머물면서 사용인들과 이곳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 잘생긴 남자와 청순한 아가씨는 언제 오는 거지?”

마우드는 그들이 과연 제 편이 될 것인지 아니면 후작의 편에 설 것인지가 궁금했다.

만약 제 쪽으로 온다면 꽤 든든한 아군이 될 것이다.

후작을 몰아세우는 솜씨 하며 테아노가 한마디도 못 하는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 어머니는 아니죠?’

‘무, 뭐라고?’

‘농담이에요. 뭘 그렇게 놀라세요.’

마우드는 루시안의 서늘한 음성을 되새기며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말이 아닌가.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곧 현실이 되었다는 걸 알면 그 잘생긴 사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그녀는 뒤이어 연약하지만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렸다.

‘당신이 르휜 양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멋대로 판단하겠지. 그런 오해와 소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위대한 석학께 어울리지 않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럼 두 사람은 오스트린에서 언제 돌아오는 거지?”

마우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테아노보다 두 사람이 먼저 돌아와야 제게는 훨씬 유리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가 보낸 쪽지는 잘 확인하셨나 모르겠네.”

아무래도 집사를 제 쪽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편지에 흔적을 조금 남겼어야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수작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사정사, 비밀을 알고 있는 신관, 아버지를 협박하는 아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라.

‘에몬 씨께서 이미 새로운 하녀를 보냈습니다. 후작님도 아는 여인이던데요.’

‘뭐? 내가 알다니. 그게 무슨.’

‘조금 전 나간 빨간 머리 아가씨가 앞으로 이 여관을 관리할 겁니다.’

하녀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빨간 머리 아가씨는 여관이 아니라 곧 이 저택을 관리하게 될 거랍니다, 잘생긴 아드님.

“아, 머리 아파.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

마우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선 문을 발칵 열었다.

“메이지, 메이지?”

그녀의 외침이 저택에 왕왕 울리고 얼마 후, 종종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네, 렉토르 양. 부르셨어요?”

마우드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고 했을 때만 해도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사정은 메이든에게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후작의 아기를 가졌다나 뭐라나.

마이어가에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른 귀족가의 경우는 종종 있다고 들었다.

적당히 돈을 쥐여주고 내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손이 귀한 가문에서는 받아주는 일도 있었다.

혹은 아이만 두고 돈을 챙겨 나가는 여인도 있었고, 심지어 저택의 하인과 눈이 맞아 도중에 달아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메이지는 그녀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테아노가 돌아오면 해결될 일이었고, 어차피 지금은 라비엘리가 없으니 제가 그녀를 맡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조금 일찍 먹을 수 있을까요? 아기를 데리고 먼 길을 왔더니 허기가 지네요.”

그 말에 메이지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마우드의 아랫배로 향했다.

“네, 준비할게요.”

“저는 차갑고 딱딱한 건 딱 질색이라서. 좋아하는 건 양고기와 토마토가 많이 들어간 스튜, 설탕으로 졸인 달걀과 치즈예요. 치즈는 베링그아 지역의 것이 좋겠어요. 후식은 간단하게 사과파이 정도로 할게요.”

“……아, 네.”

“이렇게 정확하게 말해주는 게 편하죠? 그럼 부탁해요.”

마우드는 사랑스럽게 웃어 보이더니 문을 닫고 들어갔다.

코앞에서 문이 닫힌 걸 바라보고 있던 메이지는 얼빠진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사안이 아니라는 걸, 메이지는 그제야 깨달았다.

* * *

“절대 안 돼요.”

루시안이 나른히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묻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더니 레브리안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절대.”

신전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클라인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루시안이 있었고 라비엘리는 지금까지의 일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클라인은 당혹스러운 듯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노여움을 표시한 건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은 여유로운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연신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 쓰레기 같은 자식과 결혼하는 건 생각하지도 말아요.”

“하지만 아버지 빚은 어떻게 해요?”

레브리안이 모깃소리를 내자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가씨 아버지가 해결할 일입니다. 당신 빚이 아니에요.”

“…….”

레브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전에 헤르젠을 만나 그와 나누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그에게 한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오전에 아버지를 만나 말씀드렸어요. 에몬 씨와 결혼하겠다고. 그런데…… 없던 일로 해도 괜찮은 걸까요?”

루시안은 레브리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푸른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순진하고 물정 모르는 아가씨. 생김새뿐 아니라 성격도 라비엘리와 똑 닮았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한번 쓸어 올렸다.

“상관없어요. 신경 쓸 필요도,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더니 클라인을 돌아보았다.

“알고 계셨다면서요. 이 순진한 아가씨가 그자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걸 아셨다면서요.”

“…….”

“처음부터 말리셨어야죠. 돈이면 사람도 팔아먹는 놈과 결혼할지 말지를 고민하게 두셨어요?”

루시안의 말에도 클라인은 아무 대꾸도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클라인이었다.

제가 지킬 수 없다면, 에몬이 좋은 사람이길 바란 순간도 있지 않은가.

저는 알량한 정의감 뒤에 숨어 헛된 바람이나 하고 있었다.

그가 좋은 사내가 아니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았던가. 창부든 잡부든 상관없이 아름다운 금발이면 좋다고 말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에몬 질이 그런 일을 벌일 만큼 악한 자인지 몰랐다는 말도, 전부 부질없는 소리였다.

루시안의 말이 전부 옳았고 저는 틀렸다.

“그 자식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건 굳이 오래 지켜보지 않아도 알만한 게 아닙니까? 이 아가씨를 보호한다더니 이게 보호입니까?”

루시안의 말이 지나치다 싶어 라비엘리가 말리려 했을 때였다.

“신관님께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레브리안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나섰다.

“신관님께서는 저를 위해 많은 걸 알아보셨어요. 후작님께도 찾아가셨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많은 조언도 해주셨어요. 저를 위해 노력하셨다고요.”

“그래서, 알아본 내용이 대체 뭡니까?”

레브리안은 입술에 잔뜩 힘을 주며 루시안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노력을 했다는 건지 모르겠군.”

“루시안.”

참지 못한 라비엘리가 그를 불렀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다른 사람이라면 에몬이든 에몬 할아버지와 결혼하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아니잖아요.”

루시안이 다시 소파에 등허리를 묻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클라인이 조심스레 일어서자 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에몬 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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