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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01)화 (101/136)

101화

“네, 맞습니다.”

풋맨이 정중히 대답하자 마우드 렉토르는 들고 있던 가방을 대뜸 내밀었다.

그녀는 두어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오며 상냥하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러고는 갈색 비로드 모자를 벗으며 저택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택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장식으로 가득했으며 아주 작은 소품까지 얼마나 신경 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딱 내 스타일이네. 하지만 카펫은 조금 더 어두운색이 좋겠어.’

마우드는 보들보들한 실크 장갑을 벗어서 가까이 다가온 메이든에게 건넸다.

메이든은 얼떨결에 장갑을 받아들었다.

“아, 저는 마우드 렉토르에요.”

마우드는 메이든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다 안다는 듯 제 이름부터 말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렉토르 양. 여긴 마이어가의 저택이고 전 집사 메이든입니다.”

메이든은 건네받은 실크 장갑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한데 무슨 일로 마이어가에 오셨습니까? 혹시 여행 중이신가요?”

그 사이 옆으로 다가온 하녀에게 실크 장갑을 주며 메이든이 물었다.

마우드는 메이든의 건조한 면면을 살피며 턱을 치켜들었다.

“메이든 씨라고 했죠? 마이어가의 집사가 맞으신가요?”

사실 마우드는 저택에 테아노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루미온 신전으로 갔고,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집사가 편편한 미간에 실금을 긋자 마우드가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후작님께 아직 말씀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순간 메이든은 닳도록 읽은 후작의 편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 속에는 마우드 렉토르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앉아야겠어요. 꽤 먼 곳에서 오느라 지쳤거든요. 따뜻한 차 한 잔 주시겠어요?”

마우드는 잘 말린 머리를 옆으로 정돈하며 메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우직한 성미 같았는데, 이런 유형이야 잘만 구슬리면 오히려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면서.

“에레타.”

메이든이 손짓하자 먼발치에서 두 사람을 힐긋거리던 에레타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 숙녀분을 응접실로 모시고 따뜻한 차를 내어 드려.”

“이쪽으로 오세요.”

“고마워요.”

하녀를 따라 응접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마우드는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저택에 들어간 직후의 상황을 전혀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 일종의 연기라고 생각해. 노래하지 않을 뿐 무대 위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접실 소파에 앉은 마우드는 티 나지 않게 호흡을 골랐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하녀가 다과를 준비해오자 깐깐한 얼굴의 집사도 따라 들어왔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차 맛이 좋네요.”

우아하게 차를 음미한 마우드가 조심성 없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각거리는 소리에 메이든이 속눈썹이 움찔거렸을 때였다.

“후작님과는 엘던에서 만났어요.”

“엘던이라면.”

“네, 여관이요. 사냥하러 오신 건 아니고 뭐랄까, 거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거든요.”

메이든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엘던, 엘던이라면 후작의 편지와 함께 온 쪽지 안에 거론된 장소가 아닌가.

분명 그곳에 테아노와 라비엘리, 그리고 루시안이 있다고 했다.

이로써 마우드의 말이 사실일 확률이 높아졌고 편지 속 내용의 신뢰도도 올라갔다.

“아무튼, 그곳에서 만났고 후작님께서 저를 꽤 귀여워하셨어요. 사실 전 오페라 가수인데 제 공연을 꼭 봐야겠다고도 하셨고요.”

“아, 그러셨군요.”

메이든은 이제야 마우드가 왜 저택에 찾아왔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후작에게 만족할 만큼의 화대를 받지 못하였거나, 그것을 빌미로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좀처럼 밖에서 실수하지 않는 분인데 이상하군. 거기다…… 르휜 양까지 그곳에 있다고 했는데 대체 왜.’

적당한 타이밍에 얼마를 원하는지 물어야겠다고, 그녀의 목적을 알았으니 더는 시간 끌 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저 후작님의 아이를 가졌어요.”

마우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

메이든은 오랜 시간 마이어가를 위해 일했다. 언제가 시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었다.

비사교적인 데다 결벽한 성미, 기복 없는 감정은 대저택을 관리하기에 아주 알맞았다.

특히 좀처럼 변하지 않는 눈빛과 입매 덕분에 테아노의 신임을 받아왔다.

하지만 지금, 메이든은 루시안이 저택에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분께서 저를 어찌나 귀여워하시던지. 당연한 결과지요. 한데 집사님 표정은 영 못 미더운 모양이네요.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의 아기가 어떻게 생긴 건지 집사님께 자세히 말씀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렉토르 양.”

“원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마우드는 제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상냥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순진하네?’

속내를 삼킨 마우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작께서는 아직 이 기쁜 사실을 모르신답니다. 앞으로 계속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제게 분명히 하셨으니 급할 것 없지요. 그나저나 조금 더 오래 후작님의 기쁨이 되어드리길 바랐는데 아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왔네요. 뭐 전부 신의 뜻이겠지만요.”

메이든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지만, 상대는 꽤 오랫동안 마음을 정리하고 준비해왔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그리고 원하는 바 역시 분명할 것이다.

“좋아요, 렉토르 양. 그럼 원하시는 게 무엇이죠?”

메이든의 말에 마우드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하였다.

그녀는 처음보다 코를 조금 더 높이 치켜들었다.

“집사님, 마이어가의 아이가 제 배 속에 있다고 해서 제가 그리 많은 걸 원하는 건 아니랍니다.”

“우선 말씀해보세요. 후작님의 말씀을 들어봐야겠지만,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아뇨, 상냥한 말씀이지만 집사님께서 제게 해주실 수 있는 건 없어요.”

“그건 말씀을 들어봐야 알 것 같은데요.”

마우드는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지만, 메이든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 대저택을 관리하는 건 단순히 재정을 살피고 물건을 사들이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고 누구를 고용해야 하고 누구를 조심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세월과 함께 쌓인 경험과 만남이 준 특별한 안목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무사하고 건강하게 후작님의 아이를 출산하는 일이랍니다.”

마우드는 메이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이제 허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하네요. 지낼 방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있을 것 같고…… 제가 여기서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

“잠시만요, 렉토르 양.”

메이든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여행객을 위한 방은 제가 얼마든지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층으로 올라가시려면 주인님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도와준 것도 모르고…… 제법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네? 여기서 쪽지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걸 확 밝혀?’

마우드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온화하게 웃었다.

여기서 공연히 고집을 부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좋아요. 그럼 후작님께서 오기 전까지는 조금 불편해도 감수하겠어요. 집사님이 곤란해지는 건 저도 원치 않으니까. 우리 오래 봐야 하잖아요?”

메이든이 이번에도 미간을 씰룩이자 마우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여행객 중에는 분명 임신부도 있었겠지요?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을 테고요. 그렇죠?”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지 못한 메이든이 가만히 있는 사이 마우드가 입을 열었다.

“제 수발을 들 하녀가 있으면 해요. 이 정도는 후작님의 허락 없이도 집사님 선에서 가능할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렉토르 양.”

우선 여행객들이 묵는 방을 내어주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게 맞을 것이다.

메이든은 마우드의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문전 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얌전한 성미처럼 보이지 않았다. 후작과의 염문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인 시선을 중요시하는 후작에게 어쩌면 이 여인과의 관계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이쯤에서 봉합한 뒤, 나머지 일은 후작이 돌아와 그가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후작에게 알려야 하는데, 라비엘리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당장에라도 서신을 보내야 하는데.’

메이든은 속으로만 짙은 한숨을 내쉰 뒤, 우선 문가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에레타.”

한참 만에 하녀장 에레타가 들어왔다.

“렉토르 양에게 방을 안내해드리고.”

메이든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메이지를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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