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제가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비엘리는 희박한 가능성에 기대어 한 번 더 물었다.
“누구라고요? 에몬 질?”
“네, 맞아요.”
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동명의 다른 사람이길 간절히 바랐다.
비슷한 이름이야 워낙 많지 않은가.
혹시 모른다. 라비엘리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차분히 물었다.
“사업을 한다는 게 설마…… 약초를 납품하고 여관을 운영하는.”
그러자 레브리안은 반색하며 되물었다.
“네, 맞아요. 르휜 양께서 아는 분이세요?”
“말도 안 돼.”
라비엘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몬이라니.
“르휜 양. 대체 왜 그러세요?”
레브리안은 불안한 얼굴로 라비엘리를 붙잡았다.
불길한 생각이 스쳤지만 제가 생각하는 방향이 아니길, 그저 무언가 착각했노라 말하길 바랐다.
하지만 좋지 않은 예감은 늘 들어맞았다.
“안 돼요. 그건 안 되겠어요.”
라비엘리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안 되다니요. 그게 무슨.”
“아뇨, 그 사람은 안 돼요. 설마 결혼하겠다고 말한 건 아니죠? 아직 고민 중인 거죠?”
매달리듯 토로하는 라비엘리의 얼굴은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레브리안은 이제 에몬에 관한 이야기보다 라비엘리가 더욱 걱정될 지경이었다.
“우선 들어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안에서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레브리안이 라비엘리를 이끌고 신전 방향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라비엘리가 조금 진정한 얼굴로 레브리안의 손을 맞잡았다.
“레브리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마음이 급한 탓인지, 라비엘리가 레브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그녀에게도 제게도 꽤 쉽지 않겠다고 예상하며 레브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몬 질은 끔찍한 사람이에요. 그와는 절대 결혼해선 안 돼요. 아니, 가까이에 있는 것조차 피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끔직…… 하다고요?”
에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 출신인지밖에 몰랐으니까.
레브리안이 받은 인상은 제 마음을 얻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어딘가 서툴다는 것 정도였다.
“아버지께서 에몬에게 빚을 졌다고 했죠.”
“네, 에몬 씨에게만 빚을 진 건 아니지만요.”
“그 사람, 처음에는 선심 쓰듯 돈을 빌려주지만 터무니없는 이자로 사람들을 괴롭혀왔어요. 아무에게나 빌려주는 게 아니라 갚지 못할 사람에게 일부러 돈을 빌려준다고요.”
“뭐라고요?”
“그게 전부가 아녜요. 불어난 이자와 빚을 갚지 못하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노예시장에 팔아버렸어요.”
라비엘리는 엘던에서 벌어진 일을 전부 설명했다.
아내를 잃고 아들마저 빼앗긴 바이젤 루오가 악마를 불러 에몬에게 복수하려 한 일, 신관의 등장으로 잘 마무리되었으나 정작 여관 주인인 에몬은 끝내 나타나지 않은 사실까지 말이다.
“그가 빚을 갚아주고 원하는 저택을 사서 편히 살게 해주겠다는 말도 믿어선 안 돼요. 돈이 아까워서 하루에도 수십 명이 오가는 여관 운영을 가녀린 여인 한 명에게만 맡긴 사람이에요. 그런 자가 모든 빚을 탕감해준다는 건 어딘가 석연치 않아요.”
“…….”
“에몬 질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녜요. 아니, 사악하고 잔인해요. 루오 씨의 아들은 겨우 일곱 살이었어요.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여운 아이예요. 그 어린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요.”
말하는 것도 괴로운지 라비엘리는 잠시 말하기를 멈추었다.
바이젤 루오의 울음이 아직 귓가에 선명했다. 본 적도 없는 어린아이가 눈에 밟혀 가슴이 얼얼했다.
라비엘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레브리안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한 말이 전부 사실인가요?”
“여기 오기 전, 전부 제가 보고 들은 내용이에요.”
“좋아요. 일단…… 신전으로 가요.”
하지만 레브리안은 생각보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반추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에몬 씨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그저 수완 좋은 장사꾼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수로 그렇게 돈이 많은 걸까 따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사실 레브리안은 에몬이 설명했던 거대한 저택이나 큰돈은 필요 없었다.
‘저택을 보러 갑시다. 당신이 직접 골라봐요. 로튼 일대를 샅샅이 뒤져서 우리가 살 근사한 집을 고르자고요. 그리고 우아하고 멋진 가구들로 전부 채우는 거예요.
어때요? 레브리안, 당신에게 모두 다 해주고 싶어요. 내게는 작위도 그럴싸한 명함도 없지만 누구도 내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깟 작위는 돈으로도 살 수 있는걸요.
원한다면 대저택도 당신에게 줄게요. 내게 필요한 건 오직 당신이거든.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 오손도손 사는 것만이 내가 원하는 거예요. 당신을 닮은 아이들을 낳고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귀여운 아이들의 웃음으로 대저택을 채우면서요.’
그가 늘어놓은 말이 그럴싸하게 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영원히 신전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클라인의 보살핌을 받는 것도, 그의 보호 아래 있는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에몬 정도면 나쁜 선택지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언젠가 결국 해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인가 하고도 생각했다.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애정은 허무한 것이다.
클라인을 향한 마음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었지만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레브리안.”
발끝만 응시한 채 레브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라비엘리는 불안해졌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두려웠다.
행여 그런 건 전부 상관없다고 말할까 봐, 아버지의 빚을 해결하려면 이 방법뿐이라고 할까 봐 겁이 났다.
“앞으로는 레브리안이 아니라 레비라고 불러줘요.”
레브리안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라비엘리는 그제야 제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요. 급히 말을 하려다가 그만.”
“아뇨, 르휜 양이 이름을 불러줘서 고마웠어요. 그게 훨씬 듣기 좋아요.”
레브리안이 손사래를 치자 라비엘리도 다정히 웃었다.
“그럼 나도 편하게 불러줘요.”
그러자 레브리안이 라비엘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떤 식으로 부르면 좋을지를 묻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라비엘리는 묘한 경험을 했다. 루시안이 장난스레 저를 부르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엘리, 그렇게 불러요.”
* * *
“이것 참 큰일이군.”
마이어가의 집사 메이든은 테아노에게 보낼 답신의 첫머리를 정하지 못해 고뇌하고 있었다.
‘메이든.
자네가 있어 마이어가의 상황은 크게 걱정하지 않지만, 염려스러운 것이 하나 있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루시안이 몰염치한 짓을 하진 않았는지, 혹 라비엘리에게 허튼수작을 부리진 않았는지 걱정이 되네.
알다시피 라비엘리는 마이어가의 혈통을 이을 귀한 여인인 데다 산파로부터 특별한 처방을 받은 상태네.
그녀가 잘 지내는지 걱정되는군.
메이지에게 라비엘리의 안부를 물었는데 아직 답이 없으니 이걸 보는 즉시 오스트린으로 회신하라 전하게.’
하지만 정작 그의 골치를 아프게 한 건 테아노의 편지가 아니었다.
편지와 함께 날아온 익명의 쪽지가 문제였다.
‘테아노 마이어 후작님께서는 지금 갈라테이아 인근에 있는 여관 <엘던>에 계십니다. 르휜 양과 그분의 아들 역시 이곳에 있어요. 후작께서는 당신을 시험하려 편지를 보냈습니다. 제 말을 믿든 믿지 않든 그건 당신의 선택이지만, 결과는 아주 많이 다를 거예요.
당신을 걱정하는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메이든은 손에 쥐었던 편지를 내려놓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함께 동봉된 쪽지는 누가 넣은 것이란 말인가.
그는 쪽지를 읽고 또 읽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필체였다.
‘르휜 양이 그분의 아들과 함께 여관에 있다니. 후작님까지 계신다고? 그럼 대체 어떻게 답신을 보내야 하지? 후작님의 말대로 루미온 신전에…… 르휜 양이 아드님과 함께 사라졌다는 내용을 보내야 하는가?’
무엇보다 이 쪽지를 믿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메이든이 급히 사무실에서 나와 메이지를 부르려 2층으로 올라갈 때였다.
탕탕탕-
누군가 저택 문을 마구 두드렸다.
메이든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풋맨이 나가는 걸 확인했다.
테아노가 저택을 비운 지 오래라 손님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로튼 일대를 다니던 여행객 정도려나 생각한 때였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갈매기 눈썹과 뾰족한 코끝이 인상적이라 생각한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테아노 후작님의 저택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