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라비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루시안이 나른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라비엘리.”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에 무수한 감정이 얽혀있었다.
“루시안.”
루시안은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꽤 오랜 시간 함께 있었지만 지금처럼 저를 부른 건 손에 꼽을 만큼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라비엘리가 마음을 정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감정을 덜어낸 담백한 음조가 들려왔다.
“아직 루즐 양이 내 동생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아요. 그게 분명해진 다음 이야기해요.”
“동생이 맞는다면 나와 함께 가는 겁니다.”
“후작께서 동생까지 데리고 들어가는 걸 과연 허락하실까요?”
라비엘리가 다소 쓸쓸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탐탁지 않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겁니다.”
루시안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로제를 누가 데리고 가게 해줬는지 기억해요.”
라비엘리는 그의 말에 테아노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옴짝달싹 못 하게 했던 루시안을 떠올렸다.
후작 역시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님에도 루시안의 말에 한번을 맞받아치지 못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생각하면, 라비엘리는 문득 루시안이 무서워졌다.
제게 언제까지 이렇게 친절한 얼굴을 보일까.
한순간에 돌변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당신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속내를 불쑥 꺼내었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았다. 시작은 물론 잘못되었지만 지금껏 저를 위해 애를 쓴 것도 사실이었는데. 행여 제 말에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싶어 염려했을 때였다.
“나 믿지 마요.”
루시안은 특유의 담담한 음조로 라비엘리에게 말했다.
그래,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라비엘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믿지 않는 사람을 따라 지옥으로 다시 들어가란 말인가요? 그것도 동생까지 데리고?”
“어쩔 수 없잖아. 당신에게 다른 선택권이라도 있습니까?”
그 순간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믿지 말라고 말하는 그의 눈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더하여 늘 자신만만하던 표정도 전과 같지 않았다.
“당신 지금 조금 이상해 보여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은 입술 끝만 슬쩍 들더니 미소를 보였다.
“이상하다니?”
“그렇게 되묻는 것도요.”
그때 루시안의 눈에 멀리서 걸어오는 레브리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라비엘리의 어깨를 감싸더니 레브리안이 걸어오는 방향으로 슬쩍 돌려세웠다.
“엘리,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해요.”
점처럼 작았던 모습이 점점 커지자 라비엘리의 표정에도 변화가 일었다.
레브리안은 어딘가 잔뜩 지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다고 생각할 무렵, 어깨에 닿았던 루시안의 손이 멀어졌다.
“그럼 두 사람 얘기 나눠요. 난 먼저 들어갈 테니.”
루시안은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
루시안과의 대화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레브리안이 우선이었다.
라비엘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레브리안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르휜 양.”
그사이 라비엘리를 발견한 레브리안이 멀리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라비엘리도 그녀를 따라 한쪽 손을 들고 알은체를 했다.
“왜 나와 계세요?”
“잠깐 걸었어요. 안에만 있는 게 영 답답해서.”
“그러셨군요.”
라비엘리는 방향을 돌려 신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버지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차마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저 말없이 걸어가던 중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열다섯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어요.”
레브리안은 제 발끝을 보고 걸으며 가만히 말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늘 그립고 보고 싶지만 그래도 지상에서보다 편히 계실 거라 믿고 있어요. 신관님께서 기도도 해주셨고, 제가 신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루미온 님께서 조금은 잘 봐주시지 않으실까 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우습죠?”
라비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루즐 양의 생각처럼 루미온 님께서 지켜주실 거예요. 그리고 어머님도 그곳에서 루즐 양이 늘 행복하고 편하길 바라실 테고요.”
“네, 맞아요. 그러시겠죠. 그럼 지금의 상황을 보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도 정말 궁금해요.”
“…….”
“절 강둑인지 항구인지, 정확히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곳에서 주워왔대요. 아버지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믿고 싶지 않다가도 정말 사실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루즐 양.”
“신관님 말씀처럼 달라지는 건 없겠죠. 하늘에 계신 분은 나의 어머니고 사랑으로 키워주신 건 사실이니까. 적어도 어머니께서 저를 훔쳐 온 도둑은 아니라는 건 믿고 싶어요.”
“도둑이라니요. 아녜요, 절대.”
“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버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미안해요. 당신이 너무 힘든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아뇨,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두 사람의 걸음이 맞춰지면서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우울하게 뛰던 심장박동이 조금 전보다 빨라지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우뚝 걸음을 멈춰선 레브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뭐였어요?”
레브리안이 어떤 마음으로 묻는지 알고 있어서, 라비엘리는 이 간단한 대답을 하는 것도 몹시 버겁게 느껴졌다.
“시어도네. 시어도네 르휜.”
“시어도네……. 우아하고 좋은 이름이네요.”
레브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라비엘리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과는 다르게 다소 거친 손등을 맞잡자 가슴 속에 울컥이는 것이 치민다.
“하지만 루즐 양은 레브리안이에요.”
“…….”
“어머니 아버지도 루즐 양이 갑자기 시어도네가 되는 걸 원하진 않으실 거예요. 과거를 전부 부정하는 것도 당신이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는 것도 원치 않을 거예요.”
레브리안은 고개를 들어 라비엘리를 마주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상냥한 여인이 제 언니라는 사실이 순간 벅차게 느껴졌다.
“르휜 양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라비엘리는 이제 르휜 가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제대로 말해야 할 시점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지난 일이었고 최대한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따금 맞잡은 손에 힘이 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브리안은 생각보다 침착한 얼굴로 라비엘리의 말을 들었다.
아마 기억조차 없는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기 때문일까.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에 마음 한편이 아렸다.
“그래서 지금은 테아노 마이어 후작님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어요.”
“후작님이요? 그……, 마이어 후작님 말씀이신가요?”
레브리안이 놀란 얼굴을 하자 라비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지금 신전에서 태황후 전하의 병증을 치료 중이신.”
“아, 세상에. 그렇군요. 훌륭한 분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라비엘리는 이쯤에서 그에 관한 말도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후작님께서 절 살려주신 건 감사한 일이지만, 마이어 가에서 저는 사실 무척 고통스러웠어요.”
“네?”
“그분께선 제게 원하는 바가 있거든요.”
“원하는 바라니요?”
“제가 마이어 가의 여인이 되길 원하고 계세요.”
“뭐라고요? 하지만 후작님은 너무 늙은 데다.”
거기까지 말한 레브리안이 입을 가렸다.
“죄송해요.”
라비엘리는 그녀의 충격을 덜어주기 위해 적당히 둘러대며 후작가에서의 일상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레브리안은 꽤 놀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선택권이 없어요. 우리 두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마이어가뿐이에요.”
라비엘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레브리안은 가만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아뇨, 다른 길도 있어요.”
“다른 길?”
“그러니까.”
레브리안은 다소 머뭇거리더니 말문을 열었다.
“이게 열쇠가 될지 아닐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무슨 일인지 자세히 얘기해줘요.”
라비엘리의 말에 레브리안은 마음을 먹었는지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얼마 전에 청혼을 받았어요.”
“청혼이요?”
뜻밖의 말에 라비엘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었다.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레브리안은 그녀 나름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었구나.
더는 과거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세상에, 축하해요.”
라비엘리가 어딘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축하를 건넸지만, 레브리안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불편함을 애써 꾹꾹 누른 얼굴-
“사실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몇 번 본적은 없지만 좋은 사람일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분께서는 사업도 제법 크게 하시고, 결혼만 하면 아버지의 빚도 전부 갚아주신다고 했어요.”
“빚을 갚아준다고요?”
“네, 그뿐만 아니라 원하는 저택을 사서 편히 살게 해주신다고도 했어요. 제가 에몬 씨와 결혼하면 돼요. 그럼 그곳에서 같이 살 수 있어요. 마이어 가로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돼요.”
레브리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구깃거렸다.
“뭐라고요? 방금 누구라고 했어요?”
“에몬 질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