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98)화 (98/136)

98화

레브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선술집을 빠져나왔다.

꾹꾹 누른 감정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문을 닫고 나온 뒤에도 저를 따라붙었을 것만 같은 담배 연기와 알코올 냄새를 손으로 탁탁 털어낸다.

‘아버지의 말을 전부 믿을 필요는 없잖아.’

걷는 속도에 비해 심장은 빠르고 격하게 뛰고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이 아냐.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걸 수도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을 가다듬자 걸음은 더 느려졌다.

‘술에 잔뜩 취해 있잖아. 그래, 취해있을 때가 아니라 멀쩡할 때 다시 물어봐야 해.’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였다.

그래, 어머니조차 입에 올리기를 꺼렸던 사람이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어디더라. 그……, 라함에 있는 항구였던가. 피노의 강둑이었나.’

‘…….’

‘뭐, 나는 처음부터 싫었다. 만약 아이를 낳을 거라면 일 시킬 사내아이나 두어 명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네 엄마가 어디서 다 죽어가는 계집애를 주워왔어.’

‘뭐라고요?’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데 갓난애라니. 제가 뭔 성녀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

‘머리카락 색이 노랗고 빛이 나는 게 보통 아이가 아닌 것 같아서 데려온 거지 그마저도 아니었다면.’

‘…….’

‘네 엄마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했어. 특별한 아이라고. 그래, 잘 커서 이 아비 빚을 다 갚아주었으니 특별하고말고, 대단하고말고!’

레브리안은 더는 걸어갈 동력을 잃고 우뚝 멈춰 섰다.

헤르젠 루즐은 한심한 주정꾼이었으나 이런 거짓말을 지어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없던 일을 지어내 줄줄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친딸이 아니라는 걸 밝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에몬과의 결혼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과거를 덮어두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아둔한 사람이었다.

‘강둑에 버려진 걸 주워왔다고.’

레브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팔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아서였다.

‘가자, 신전으로 가자.’

과거는 뒤집혔어도 현재는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신전의 잡부인 레브리안 루즐이었다.

루스에게 꾸지람을 듣기 전에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라비엘리는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신전 정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레브리안이 제 아버지를 만나고 오겠다며 나간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였다.

‘이야기는 잘 나누었을까.’

입에 가득 바람을 채웠다가 천천히 내보내며, 라비엘리는 레브리안을 생각했다. 아버지에 관한 말을 꺼내며 다소 음울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의 얼굴을.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표면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사실 탐색이나 다름없는 대화였다.

라비엘리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레브리안이 제 동생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반, 그녀의 혼란과 과거를 부정하는 마음이 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절반이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팽팽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기대하지 않았던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루시안이었다.

“라비엘리, 왜 나와 있어요?”

그는 알레의 속도를 천천히 늦추더니 늘 그랬듯 우아한 미소를 보냈다.

라비엘리가 별말 없이 옆으로 물러서자 어느샌가 코앞까지 다가온 루시안에 가볍게 말 위에서 내려왔다.

“나 기다렸어요?”

“아뇨.”

라비엘리는 거칠고 보드라운 알레의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그를 기다린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분명 눈을 마주치면 그 사실을 들킬 것 같아 라비엘리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니면 누구지? 루즐 양인가?”

루시안이 종이봉투를 묶어놓았던 끈을 풀며 질문을 던졌다.

“네.”

그는 약초가 담긴 봉투를 한 손에 쥐고는 라비엘리의 표정을 살폈다.

어딘가 흐릿한 그녀의 눈빛. 잡념으로 무거워진 이마와 열기가 올랐다 빠진 두 뺨까지.

“어디에 갔는데요?”

루시안의 질문에 라비엘리가 그를 빤히 보았다.

“아버지를 만나러 갔어요. 꼭 묻고 싶은 게 있다면서요.”

“그래서 그렇게 근심 어린 눈을 하고 있군요.”

“근심이랄 것까진 없지만.”

“당신 거짓말하면 코끝이 빨개진다고 했잖아요.”

루시안은 제 코를 톡톡 건드리며 라비엘리에게 말했다. 그의 능청스러운 표정에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여기 서 있는다고 빨리 올 것도 아닌데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요.”

루시안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더니 돌려세우려 했다.

“아뇨, 그냥 여기 있을게요.”

라비엘리는 이미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같이 걸을까요?”

“…….”

“당신에게 상의해야 할 일도 있고.”

“상의해야 할 일이라니.”

“신전 안에서 하는 것보다 밖에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 이야기.”

두 번째로 한 말에는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그러죠.”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는 루시안을 따라 신전에서 조금 멀어졌다.

천천히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초조하던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 것 같았다.

물론 루시안이 입을 열면 이 짧은 평화는 곧 깨지리란 것을 알지만.

“상의해야 할 일이 뭔가요?”

갑자기 놀라는 것보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라비엘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

루시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그냥 앞으로의 계획.”

“무슨.”

“당신과 내가 조금 더 편해지기 위한 계획이라고 해두죠.”

“왜 나와 당신을 하나로 묶는 거죠?”

라비엘리가 코웃음을 쳤지만 루시안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알잖아요. 내 계획에는 늘 공범이 필요한 거.”

그러더니 라비엘리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루시안이 여관을 떠나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다시피 나는 꽤 계획적인 사람이라서.’

지금까지 레브리안에게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던 일이 불현듯 파도처럼 밀려왔다.

설마 지금, 테아노 마이어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말하려는 것일까.

라비엘리는 불길하게 뛰는 가슴을 잠재우려 노력했지만 어쩐지 그에게 전부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태황후 전하의 병증이 많이 개선되었어요.”

“…….”

“우리가 신전에 온 목적도, 이제 확인하는 일만을 남겨 두었고요. 이제 마이어 가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루시안은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진지하고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라비엘리가 몸에 힘을 주었다.

“신전에 있으면요? 신관님께 부탁드려서 저도 이곳에…….”

“여기서 그 아가씨와 함께 잡일이라도 하면서 지내겠다고요?”

“…….”

“정말?”

“뭐든요. 전 동생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라비엘리가 단단한 음조를 냈지만 루시안은 코웃음을 쳤다.

“루즐 양도 개인적인 이유로 잠시 신전에 신세를 지는 것뿐이지 여긴 여관도 뭣도 아니에요. 그런데 당신까지 여기서 살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럼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우선 나와 함께 마이어 가로 가요.”

“거긴 싫어요. 그 끔찍한 곳에 동생과 함께 갈 순 없어.”

라비엘리는 떨고 있었다.

그곳은 제게 안식처도 집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눈만 뜨고 있었을 뿐, 살아있어 살았을 뿐, 일말의 용기가 있고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를 동생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라비엘리.”

“…….”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

“내가 있잖아. 후작은 당신에게 절대 함부로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날 믿어 봐요.”

라비엘리는 걸음을 멈춰 섰다.

신전에서는 제법 멀어져 있었고 라비엘리의 마음은 갈 곳을 잃은 채 부유하고 있었다.

“돌아간 뒤에는요? 당신을 믿으면서 그렇게 시간만 보내면 되나요?”

루시안은 그녀가 질문 속에 무서운 것을 숨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럴 리가. 당신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는 멈춰 선 라비엘리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사랑을 속삭이듯 온화하고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마이어 가가 어떻게 내 손에 들어오는지를 지켜봐요.”

“아니, 난 모르겠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만 내게는 말하지 말아요.”

이제는 그와 공범이 될 수 없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으나-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라비엘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두 손으로 팔을 감싸 안았다.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그들의 말소리를 전부 실어 후작에게 전할 것만 같았다.

불길하고 두려웠다.

“그래요, 엘리. 애석하고 아쉽지만 그러죠. 당신은 모르게 움직일게요.”

“…….”

“그나저나 나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하려는데, 당신은 다른 걸 지키려고 나를 외면한다니.”

루시안의 적갈색 눈동자에 반조된 빛이 흐릿하게 퍼졌다.

“이거 영 서운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