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엘자, 엘자!”
멀리서 찢어질 듯 예민한 니엘의 음성이 날아와 박혔다.
“네, 주인님!”
엘자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황급히 달려갔다.
“아휴, 무슨 일이시람.”
물론 니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엘자를 불렀다. 목 바로 아래부터는 꼼짝도 할 수 없으니 매 순간 엘자와 하인들의 손길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격한 음성으로 찾는 건 불길한 전조가 아닐 수 없었다.
“주인님, 부르셨어요?”
엘자가 한 손으로 들썩이는 가슴을 누르며 니엘 곁에 다가갔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니엘의 상태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루시안에게서 편지가 왔다는 사실에 잔뜩 상기되어선 오늘 밤을 편안히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주인님, 어디 불편하세요?”
하지만 정작 니엘을 마주하자, 조금 전 악을 쓰듯 저를 부른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얼굴이었다.
엘자는 우선 니엘의 자세가 불편하지는 않은지부터 살폈다. 그의 얼굴이 불안으로 얼어붙어 있는지, 혹 경련이 일어난 건 아닌지.
조금 전 편지를 읽을 수 있도록 비스듬하게 기대 앉혀 놓았는데 자세는 문제없어 보였고 편지 역시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엘자.”
“네, 주인님.”
“내가 좀 이상한가 봐.”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세요. 자세를 바꿔드릴까요?”
엘자는 안절부절못하며 니엘을 살폈다.
“아니, 내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야.”
“예?”
“이 편지, 다시 읽어줄래?”
니엘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편지 말씀이세요?”
엘자는 조심스레 침대 위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바스러질 듯 낡고 묵은내가 나는 종이였는데, 그 안에 익숙한 활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루시안이 니엘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건 루시안 도련님께서 주인님께 보내신 편지잖아요.”
엘자가 되물었지만 니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불안한 눈빛의 노부인은 제 얼굴을 한번 어루만진 뒤 니엘을 힐끗거렸다.
분명 편지를 읽어달라 했으나 정말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 파악해야만 한다.
사지가 마비되어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니엘의 성정은 점점 더 괴벽해졌고,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엘자는 그것이 극심한 스트레스와 몸의 이상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개인적인 편지를 읽어달라는 것 역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봐야만 했다.
엘자가 편지를 집어 들기를 주저하자 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엘자, 어서.”
핏기없는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자는 그제야 만져서는 안 될 것을 만진 표정으로 루시안이 보냈다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앞치마 주머니를 뒤적이며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 노안으로 가까이에 있는 활자가 흐릿하게 보인 탓이다.
그녀가 꼬물거리며 편지를 읽을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니엘은 표정 변화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엘자가 다리가 다 벌어진 안경을 코 바로 아래에 올려놓았다.
“친애하는 니엘.”
엘자의 음성이 시작되자 니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건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맥없이 아래로 가라앉자 니엘의 세상은 완전한 어둠이 되었다.
“니엘, 나는 지금 오스트린의 루미온 신전에 와 있어. 갑자기 오스트린이라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니엘은 어둠 속에서 마치 빛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루시안을 그려보았다. 비단처럼 고운 녀석의 머리카락과 서늘함이 스민 피부와 비탄이 숨겨진 두 눈까지도.
눈을 감자 엘자의 느릿한 음조가 천천히 루시안의 음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후작은 지금 오스트린의 신전에서 태후 전하의 병증을 가라앉히는 데 매진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이곳에 올 기회가 생긴 덕분에 나도 신전에서 머물게 되었고, 갈라테이아 인근에서 보낸 시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있었지. 다만 네가 기대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애석하군.”
“…….”
“니엘, 우리의 계획을 조금 변경해야 할 것 같아.”
엘자는 잠시 니엘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얼핏 평화로워 보였으나 광대가 땀으로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그가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테아노가 아끼는 것을 없애는 것이, 그를 얼마나 괴롭게 할지 잘 모르겠어.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데다 그 여자에게 그리 큰 애정을 품은 것 같지 않아. 아니, 오히려 그 여자를 증오하고 있어.”
엘자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계속 읽어나갔다.
“후작은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할 생각조차 없어. 그러니 여자를 없애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대신 그를 없애는 데 동의한다면 바로 움직일게.”
편지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엘자는 망연한 얼굴로 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주인님.”
“계속 읽어.”
엘자는 잔뜩 굳은 얼굴로 안경을 한 번 고쳐 썼다.
‘오, 신이시여.’
엘자는 니엘이 무서운 일을, 그러니까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니엘의 증오는 생각보다 깊었고 지독했으며 젊은 사내를 비탄 속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침대에 갇힌 채 누군가를 미워하며 시간을 보내길 바라지 않았다.
“그럼 계속 읽겠습니다.”
제발, 이런 상황까지는 닥치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랐건만.
“……방법은 생각 중이야. 어떻게 하면 고통스럽지만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을지는 조금 더 고민해볼게. 너도 내 계획에 동의하리라 믿어, 니엘.”
엘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편지를 반으로 접었다.
“주인님, 안 돼요. 지금 루시안 도련님께서 대체 무슨 말씀을. 설마 복수라는 게 사람을 어,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지요?”
그때, 완전히 닫혀 있던 니엘의 두 눈이 천천히 벌어졌다.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인지 목 아래 잔근육들이 꿈틀거리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엘자, 계속 읽어.”
“주인님.”
엘자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낡은 종이 위에 적힌 활자를 읽는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테아노 마이어를 처리한 뒤 돌아갈게. 이 소식이 너의 슬픔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다면.”
엘자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도로 루시안의 편지를 내려놓았다.
“주인님, 이건 안 돼요. 루시안 도련님께 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노부인의 말에 니엘이 입술을 기묘하게 비틀기 시작했다. 그는 연달아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그렇지? 엘자가 보기에도 이 녀석 말이 이상하지?”
“네, 주인님. 이건 아니에요. 사람을 죽이다니요. 설마 주인님께서 말씀하셨던 복수가 이런 건 아니었지요?”
“맞아, 아니었어. 아니었지.”
니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젠장!”
“……주인님.”
“내가 원하는 건 살아있는 동안 그 자식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야. 나처럼 사지가 마비된 채 꼼짝도 못 할 고통을 원해. 곁을 지키던 사람이 떠나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는 일이라고!”
“맙소사, 주인님. 진정하세요!”
니엘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엘자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몸을 붙들었지만, 니엘의 발작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고통, 더 끔찍한 고통을 원해. 그를 죽여버리는 것만으로는, 절대…… 절대 이런 고통을 느낄 수가 없잖아……! 죽음은 그저 종착역일 뿐이야. 그를 죽여선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오, 이런. 트리나! 엘렌! 어서 와, 빨리!”
급기야 니엘이 흰 거품을 뱉어내더니 두 눈마저 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경련이 시작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엘자는 침착하게 니엘을 도로 눕히고는 그의 고개를 돌렸다.
“아악, 악!”
하지만 그는 울부짖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인님, 제발. 제발 진정하세요.”
뒤따라 들어온 하인들이 니엘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명이 회반죽처럼 창백해진 니엘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정성껏 닦았다.
한참 만에 니엘은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다. 침대에 매달린 이들이 전부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무렵, 그들의 주인은 안정을 되찾았다.
“…….”
그는 다시 통나무처럼 반듯하게 누워선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엘자.”
“네, 주인님.”
“내 친구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니엘은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다시 비탄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루시안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져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저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는 저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루시안에게 다른 감정이 스며든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저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참을 수 없었고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실체를 알아야겠어, 엘자.”
“주인님.”
엘자가 조심스레 안경을 벗어 주머니 속에 넣었을 때였다.
“지금 당장 편지지를 가져와.”
“네.”
엘자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지금 당장 그 여자에게 편지를 보내야겠어.”
니엘은 호흡을 정돈하며 창밖 너머를 응시하였다.
루시안, 안타깝지만 나는 네 계획에 동의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