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뭐야?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헤르젠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말꼬리를 비틀었다.
레브리안 역시 술독으로 검붉게 변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돌아가고 싶었지만,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날 이후 레브리안은 라비엘리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어딘가 저와 비슷한 성격과 취향에 놀라우면서도 제 과거를 꼭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이는 주정꾼 아버지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가 난동을 부린 후, 신전에서 지낸 탓에 헤르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레브리안은 수소문 끝에 헤르젠이 오스트린의 외곽에 있는 주점에서 종종 목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헤르젠을 마주한 것이다.
헤르젠은 남은 맥주를 발칵발칵 들이켠 뒤,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레브리안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를 향해 손을 들었다.
마른 수건으로 빈 잔을 닦던 사내는 헤르젠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 잔 더 줘.”
“돈부터 내.”
“에이, 씨. 내일 준다고 했잖아.”
“됐으니까 돈부터 가져오라고.”
“젠장!”
헤르젠이 빈 유리잔을 소리 나게 내리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레브리안이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바 너머의 사내에게 돈을 건넸다.
“여기요. 저분 술값 이걸로 계산할게요.”
사내는 레브리안을 위아래로 훑더니 돈을 받았다. 그런 뒤, 잔에 맥주를 가득 채워 그녀에게 건넸다.
탁-
헤르젠 앞에 술을 내려놓은 레브리안이 건조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헤르젠 루즐은 이미 코가 새빨개질 만큼 취해 있었지만, 술을 마주하자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아버지, 이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레브리안의 말에 헤르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꼴깍대며 절반 이상을 비워낸 뒤에야 헤르젠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침묵을 대답이라 여긴 레브리안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고요.”
“그래, 네 엄마는 내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을 테니까.”
헤르젠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레브리안은 그 순간,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해봐야 그가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좋은 말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갑자기 나타나 행패를 부리지도, 딸을 사채업자에게 팔아넘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제 출생에 관한 비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헤르젠이 유일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남자의 입을 열어야 한다.
‘빚을 감당할 수 없어서 나타난 사람이야. 내가 에몬 씨와 결혼하면 빚을 에몬 씨가 전부 탕감해주신다고 했으니까.’
“너 그딴 소리 하러 온 거면…….”
“저 에몬 씨와 결혼할게요.”
레브리안의 말에 헤르젠이 고개를 쳐들었다.
“뭐?”
“저 결혼할게요. 그리하면 에몬 씨가 빚을 전부 갚아주신다고 했잖아요. 저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테고요.”
“아아, 그래! 그래 맞아, 그랬지.”
“그래서 그 말씀 드리려고 온 거예요.”
“오, 세상에. 예쁘고 착한 내 딸!”
헤르젠은 갑자기 손을 뻗어 레브리안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녀가 뒤로 물러나며 헤르젠의 손길을 피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사내는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아주 잘 생각했다. 그래, 그래야지.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아무튼, 그럼 당장 오늘부터 집에 갈 수 있겠군.”
그는 히죽거리더니 남아 있는 술을 완전히 비워냈다.
“이봐, 여기 한 잔 더 줘!”
이런 한심한 자가 내 아버지라니.
아니, 어쩌면 이자는 내 아버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버지.”
레브리안은 역겨움이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눌렀다.
“에몬 씨와 결혼하기로 마음은 굳혔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헤르젠이 한결 누그러진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자, 일단 앞에 앉아봐. 앉아서 얘기하자.”
“…….”
“응? 자자, 우선 앉아. 그래, 당장에라도 결혼할 수 있는 거지?”
레브리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위대하신 루미온 님의 밑에서 일을 한 보람이 있군. 신전에서 일하더니 확실히 달라!”
“…….”
“자, 어서 여기 좀 앉아봐라. 응?”
레브리안은 어딘가 축축해 보이는 나무 의자를 당겨서는 그 위에 천천히 앉았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알겠으니 뭐든 말해.”
“어머니와는 제가 어렸을 때 헤어지신 건가요?”
레브리안의 질문에 헤르젠의 얼굴이 순식간에 식었다.
“뭐? 대체 뭐가 궁금한 거야. 나와 네 엄마의 결혼 생활이라도 묻고 싶은 거야?”
“아뇨, 그러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질문.
레브리안은 이 한심한 사내가 과연 제대로 대답해 줄 것인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뭘 말하는 거야?”
“저는 어디에서 왔죠?”
레브리안의 말에 헤르젠은 한쪽 눈썹을 비틀었다.
“뭐?”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요, 아버지.”
“어디서 오긴 뭘 어디서 와?”
“아버지, 저 지금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녜요.”
헤르젠은 그제야 레브리안이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텅 빈 술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레브리안은 헤르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말씀해주세요.”
“이거 먼저 받아 와.”
“말하지 않으시면 에몬 씨와의 결혼은 없던 일로 할게요.”
“뭐?”
“전 어차피 결혼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신전에서 일하면서 지금처럼 살면 되니까요. 저 사실 돈에도 크게 관심 없거든요.”
레브리안은 헤르젠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더니 주머니 속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던지듯 올려놓았다.
“자, 전부 가져가세요. 전 이런 거 필요 없어요.”
“…….”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에몬 씨와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고, 아버지께서 사채업자에게 쫓기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어요.”
“이, 이년이 지금.”
레브리안은 다부진 표정으로 헤르젠을 응시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심장은 몹시 거칠게 뛰고 있었다.
“젠장.”
그녀가 단순히 객기를 부리거나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서 알고 온 건가?’
헤르젠은 서슬 퍼런 얼굴로 저를 찾아와 레브리안에 관해 이야기해주던 에몬을 떠올렸다.
레브리안이 어릴 때 집을 나온 이후 제게 부인이나 딸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딸 아이의 존재와 신전에서 일한다는 사실까지 알려주지 않았던가.
그 정도의 정보력이라면, 아마 레브리안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설마 에몬에게서 무언가 들은 걸까?
‘하, 하지만 제 말을 들어 줄까요?’
‘그건 너한테 달렸지. 그 애가 나와 결혼만 해준다면 네 빚을 전부 탕감해주겠어. 원한다면 지참금으로 다른 곳에서 끌어다 쓴 것도 갚아주지.’
‘저, 정말이십니까?’
‘성사시키지 못하면 그 뒤에는 재미없을 거야.’
‘…….’
‘이미 밀린 이자만 해도 얼마인지 알고 있지? 만약 제때 갚지 못한다면 난 네놈의 목이라도 가져갈 거야.’
헤르젠은 반사적으로 빈 잔을 집어 들었다.
술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에몬의 서늘한 음성을 생각하자 목구멍이 타는 듯이 말라왔기 때문이다.
“너.”
그래, 어차피 알고 왔으니 상관없겠지.
게다가 어미는 죽은 지 오래고 수십 년이나 흐른 이야기가 아닌가.
“강둑에 버려진 걸 네 엄마가 주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