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레브리안, 이제 진정이 좀 되었니.”
클라인의 질문에 레브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정이라는 건 그저 태연한 표정 속에 마음을 감춘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벌게진 두 눈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놓인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브리안.”
“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클라인은 얌전한 얼굴로 제 음성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레브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클라인 역시 레브리안이 르휜가의 여인이길 몹시 바랐다.
만약 그녀가 르휜가의 자손이라면, 적어도 지금처럼 살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라비엘리 르휜의 후견인이 테아노 마이어 후작이라 했으니, 그에게 레브리안을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명망 높은 석학인 데다 이미 라비엘리를 돌보고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적어도 에몬 질 같은 놈과 결혼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물론 문제는 있었다.
헤르젠 루즐, 도박 빚 때문에 하나뿐인 딸을 에몬에게 팔아넘기려는 작자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레브리안이 루즐의 이름을 포기하고 르휜가의 여인이 된다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만약 그것으로도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쉽지 않겠지만, 클라인은 제 이름으로 된 가문의 재산을 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에몬의 민낯을 마주한 이상 레브리안이 그와 엮이는 것만큼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네, 말씀하세요. 신관님. 저는 신관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전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네가 혼란스러운 것 이상으로 르휜 양 역시 힘드셨을 거야.”
“…….”
“너는 오늘 처음으로 네 과거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르휜 양은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잃어버린 동생을 그리워해 왔다.”
클라인의 말에 레브리안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지금껏 흥분으로 상기되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면면이었다.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르휜가의 사정은 좋지 않아. 그분의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르휜 양은 홀로 남았다.”
레브리안은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얼굴을 한 여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제 유일한 혈육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어. 그건 르휜 양이 품어온 유일한 희망일지 모른다.”
“…….”
“네가 혼란스러운 것도 잘 알겠고, 과거를 통째로 부정당한 것 같은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르휜 양도 비슷하다는 걸 알면 좋겠구나.”
클라인의 말에 레브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저보다 훨씬 더 오래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제 감정에만 빠져서 생각하지 않을게요.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그래.”
클라인은 하마터면 레브리안의 뺨을 어루만질 뻔하였다. 주먹에 힘을 주며 그것을 가까스로 참아낸 순간, 레브리안이 다시 말했다.
“신관님, 저 다시 가서 말씀드려야겠어요.”
* * *
끼익-
레브리안이 다시 사제실로 들어왔을 때,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걱정해야 할지 몰라 두 손만 맞잡고 있을 때였다.
레브리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르휜 양, 조금 전에는 미안했어요.”
“아뇨, 아니에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레브리안은 다시 입술을 꼭 붙이더니 등 뒤에 서 있는 클라인을 한 번 쳐다보았다.
클라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지 한결 차분해진 얼굴이 되었다.
“우선 앉아요, 루즐 양.”
라비엘리의 말에 레브리안이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너무 제 생각만 한 것 같아요. 르휜 양의 아픔은 이해하지 못하고, 제 입장만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르휜 양께선 무척 기다리고 바랐던 순간이셨을 텐데. 어쩌면 평생을요.”
“…….”
레브리안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차분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클라인과 대화하며 생각을 정리한 덕분인지, 조금 전보다는 침착하게 라비엘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일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밝혀낼 수 있는 것이라면 풀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묻어두면 될 것이었다.
마음을 정한 레브리안은 신고 있던 낡은 가죽신 한쪽을 벗었다.
그녀가 움직이자 라비엘리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저도 모르게 두 손은 움켜쥐었을 때였다.
그 순간 드러난 레브리안의 작은 발. 창백하리만치 흰 발등 위에 흐릿하지만 분명한 선이 있었다.
레브리안은 사람들 앞에서 발을 보인 게 부끄러운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예감한 것인지 얼굴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제대로 약을 바르거나 치료를 받지 못해 여러 번 덧났다고 했어요. 아기의 살성이 좋아 이렇게 희미하게 흔적만 남았지만.”
레브리안은 다시 가죽신에 발을 넣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다친 건지는 몰라요. 하지만 제게도 분명 발등에 상처가 있어요.”
“맙소사.”
라비엘리는 한 손으로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가렸다.
“이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하지만 상처 정도는 언제든 생겼다가 없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고작 발등에 난 상처로 동생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클라인 역시,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한 사람이 아닐까 싶을 만큼 닮은 외모 때문에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신께 기도를 드리면 응답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이런 사사로운 일로 직위를 남용할 수는 없었다.
사제실 안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고 있을 때였다.
어느 정도 불안을 걷어낸 눈으로, 라비엘리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게 확실하지 않네요.”
“네.”
“하지만 이렇게 루즐 양을 만나본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어요.”
라비엘리는 흐릿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 미안한 부탁이 한 가지 있는데.”
“말씀하세요.”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라비엘리가 천천히 레브리안을 안았다.
그녀를 끌어안은 순간, 불확실하던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마주한 이가 혈육인지 아닌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즐 양에게 내 동생이 되어달라고 강요하지도 확인하지도 않을게요.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냥 이렇게 당신을 만난 것으로 감사해요.”
“…….”
라비엘리는 다시 레브리안을 놓아 주었다.
만약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녀를 알아보았을까.
하지만 가문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지 않았더라면, 레브리안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슬프고도 묘한 아이러니를 가슴 속으로 삼키며 서로를 마주했을 때였다.
“저, 르휜 양.”
“네.”
이번에는 레브리안이 말문을 열었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지만 그런 와중에도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르휜 양은 좋아하는 게 뭐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비엘리는 얼굴을 한 번 매만진 뒤 담담히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전 여자 주인공이 비극적인 삶을 사는 내용을 좋아해요.”
“잠깐만요.”
“……?”
“혹시, 그 책 이름.”
“몰리 이아신스.”
“몰리 이아신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책 이름을 말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몰리 이아신스는 라비엘리가 여관에서 저를 대신해 썼던 이름이기도 했다.
같은 이름을 말하자 레브리안은 다소 흥분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라비엘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몰리 이아신스를 꼭 읽어보라고 사람들에게 추천했는데, 전부 한심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라고 했어요. 얼마나 상심했는지 몰라요.”
레브리안은 그러더니 다시 눈을 빛냈다.
“르휜 양, 또 좋아하는 게 뭐가 있어요?”
라비엘리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좋아했어요. 멀리 보이는 별과-”
“저 검은 하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저도 늘 궁금했어요.”
“계절마다 바뀌는 별자리를 기억했다가-”
“전부 기록해서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건데.”
“……맙소사.”
“말도 안 돼.”
레브리안은 처음보다 상기된 얼굴로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저 지금 좀 이상해요.”
“루즐 양.”
“그러니까, 조금 많이 이상한 것 같아요.”
“저도 그래요.”
“르휜 양, 그럼 혹시 러스티 다이어리, 읽어봤어요?”
“네, 물론이지요.”
“거기 나왔던 남자 주인공 중에 특히 마음에 들었던 사람은.”
“루이 안.”
“루이 안.”
“이건 말도 안 돼.”
“루이는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맞아요. 하지만 루이만큼 매력적인 남자는 없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레브리안은 고개를 돌려 클라인을 올려다보았다.
클라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들썩이자, 레브리안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어쩜 이렇게 취향이 비슷할 수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