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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94)화 (94/136)

94화

문밖으로 나온 레브리안은 무작정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길고 긴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빗자루를 세워놓은 정문 근처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빗자루를 집어 들고는 닥치는 대로 바닥을 쓸었다.

사각, 사각-

얇은 싸리나무가 바닥을 한 번 훑고 지나갈 때마다 레브리안의 가슴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따갑고 아렸다.

‘당신이 르휜가에서 사라진 아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레브리안은 빗자루를 조금 더 세게 잡아 쥐었다. 비질을 할수록 생채기가 심해지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지만 조금 전 나누었던 대화는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신관님께서 저를 데려오신 이유가 궁금하죠?’

하지만 클라인의 이름 앞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신관님께서도 알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 이미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만약 그 역시 내가 르휜 양의 잃어버린 동생이라 생각하신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장 클라인을 만나고 싶다가도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몰라 다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레브리안은 천천히 비질을 멈추었다. 빗자루와 바닥이 부딪히며 내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마음 한편이 공허해지며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빗자루를 움켜쥔 채 제 발등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라비엘리가 말한 발등의 상처는-

“레브리안!”

멀리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클라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관님.”

목소리는 분명 클라인인데, 순식간에 앞이 뿌옇게 변한 바람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대충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고 나자, 그제야 놀란 얼굴의 클라인이 보였다.

“신관님, 저.”

“레브리안,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그러니까, 그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제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고 있는데, 레브리안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혹스러움이 저를 집어삼키기 전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혼란은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잡고 길게 늘어져 있었다.

“신관님, 알고 계시다면서요. 르휜 양과 전부 이야기하셨다면서요.”

레브리안은 우선 클라인에게 매달리기로 했다.

모든 것이 저와 닮아 있지만 낯선 그 여인보다 클라인과 정리하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우연히 알게 되었다.”

클라인은 레브리안에게 <엘던>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에몬의 이름을 입에 올릴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했다.

악마를 부른 건 바이젤 루오였으나 애초에 에몬이 뿌린 죄악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에몬에 관해 말해야 하는 것인가.’

클라인은 고개를 돌려 위태로운 얼굴로 저를 주시하고 있는 레브리안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에몬의 이야기까지 꺼냈다간 레브리안이 받을 충격은 배가 될지도 모른다.

“우연히요? 우연히 어떻게 아시게 된 건데요?”

클라인은 우선 지금의 상황만을 설명하기로 했다.

끔찍한 과거도, 위험한 순간도 전부 가리고 라비엘리와 대화를 나누었던 부분만을 꺼내 놓았다.

“……고통받는 사내를 위로하려 르휜 양이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셨다. 그러다 우연찮게 그분에게 동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어쩐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게 레브리안 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네 머리카락 색은 흔한 것이 아니야. 게다가 그저 비슷하다고 넘기기엔 르휜 양과 너무 닮았다.”

“그건.”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클라인은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충분히 의심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레브리안, 나는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르휜 양을 모셔온 게 아니야.”

낮고도 진중하게 흘러나오던 클라인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레브리안은 그제야 오래도록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만약 저라면.”

손에 땀이 날 만큼 힘을 준 레브리안이 클라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저희 어머니는 대체 누구예요?”

“레브리안.”

“이상하잖아요, 신관님. 그럼…… 저를 키워주신 어머니는 대체 누구예요? 어머니께서는 누구보다 절 사랑하셨는걸요. 저는 어머니가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레브리안, 그건.”

“만약 제가 르휜가의 아이라면 어머니는 대체 누구죠? 저를 납치한 유모인가요? 아니면 유모에게서 아이를 산 사람이에요?”

레브리안은 어머니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순간을 기억해요. 아직도 선명하다고요.”

레브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바보같이, 전부 저 때문이었는데. 형편에 맞지 않는 꿈을 꾸지 말았어야 했는데. 책을 읽는 일 따위에 관심을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몇 달이 걸려도 좋으니 꼭 구해달라고 한 바람에……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어머니는 일을 하셨다고요. 전부 저 때문에!”

“레브리안.”

클라인은 레브리안이 들고 있던 것을 빼앗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를 안아 주었다. 잔뜩 흥분한 탓에 울음과 열기로 범벅이 된 여인을 달래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흑, 흐흑…….”

레브리안은 클라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바다를 뚝 떠다 놓은 것처럼 푸른색 눈동자, 잘 관리했다면 아마 황홀한 빛을 내었을 금색 머리카락과 여린 피부.

천진함과 슬픔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열다섯의 소녀를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 레브리안. 어머니를 위해 내가 어떤 기도를 올리면 좋겠니?’

‘어머니의 영혼에 축복을 내려 주세요.’

‘어머니의 영혼?’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어요. 저 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일하셨죠. 처음으로 일을 쉬고 누우셨는데, 일어나지 못하셨어요.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

‘신관님, 저에 대한 건 전부 잊으시고 어머니께서 부디 평안하시길 빌어주세요. 라힐라 님(저승의 신)의 보살핌 속에서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시길요.’

클라인은 레브리안의 등을 차분히 어루만져주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공허함을 달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이토록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아마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라비엘리와의 대화 속에서 어쩌면, 혹시- 라는 예감이 조금 더 진해졌기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신관님. 저는 대체 누구일까요…….”

클라인은 말없이 그녀의 호흡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레브리안이 입술을 붙이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죄송해요.”

“레브리안.”

클라인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레브리안이 씩씩한 표정을 지어내며 엉망이 된 얼굴을 매만졌다.

“네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든지 내가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만.”

“…….”

“지금 단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네.”

“열다섯 해 동안 길러주신 분이 너의 어머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거다.”

“신관님.”

“어머니께서 너를 사랑하셨다는 것 역시 변하지 않는 진실이야. 네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고 해서 과거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

“그러니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거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네.”

“그래, 착하구나.”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는데, 뜻대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신관님.”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에 물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클라인을 다시 와락 끌어안았다.

“고맙습니다. 저는 정말 신관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정말요.”

“…….”

그러더니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어 설핏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런 의미로 레비라고 불러주시면 안 돼요?”

“안 돼.”

“너무해요.”

젊은 신관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아니 이 땅에서 제게 이런 식으로 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레브리안뿐이라는 것을.

오직 그녀만이 저를 이토록 힘들게도, 웃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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