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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93)화 (93/136)

93화

“신관님.”

클라인을 먼저 발견한 레브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라비엘리를 등지고는 클라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 좀 도와주세요.”

“뭐?”

“저 여자, 아버지가 보낸 사람인가 봐요. 돈을 받으러 온 것 같아요.”

클라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얼굴로 서 있었다. 대화를 시도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르휜 양.”

클라인은 레브리안의 어깨를 두어 번 도닥이더니 라비엘리를 불렀다. 클라인이 그녀를 부르자, 레브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젊은 신관을 올려다보았다.

“신관님께서 아시는 분이세요?”

“두 분, 아직 말씀을 나누기 전이군요.”

그의 말에 라비엘리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올렸다. 머릿속으로만 했던 상상과는 사뭇 다른 반응인 데다 레브리안이 저를 피하는 바람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클라인은 레브리안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움켜쥐더니 벽면에 기대 세웠다.

“여긴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군요. 같이 가시죠.”

“…….”

“레브리안, 너도.”

클라인을 따라 복도를 걷는 내내 레브리안은 라비엘리의 뒷모습을 힐끗거렸다.

대체 누구길래 클라인이 알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도 레브리안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나 에몬 씨와 관련 있는 사람은 아닌 건가.’

다만 클라인이 아는 사람이라니 경계심은 다소 허물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라비엘리와 레브리안이 안으로 들어서자 눈치 빠른 로제가 문 앞에서 말했다.

“그럼 저는 차를 좀 가져올게요.”

로제가 문을 닫고 나가자 사제실 안에는 미묘한 표정의 세 사람만이 남았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와중에 클라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레브리안, 르휜 양은 내가 신전으로 모셔왔다.”

“신관님께서 모셔오셨다고요?”

클라인이 레브리안에게 엘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클라인의 대답이 떨어지게 무섭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신관님, 여기 계셨어요? 대신관님께서 급히 찾으세요.”

“대신관님께서?”

“네.”

클라인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자 라비엘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다녀오세요.”

“죄송합니다.”

“신관님, 만약 루스 만나시면 저 농땡이 치는 중 아니라고 꼭 말씀해주세요.”

레브리안의 말에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다시 두 사람만 남자, 사제실은 서먹한 공기가 감돌았다.

라비엘리는 먼저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레브리안의 옆얼굴을 마주하면 어쩐지 잔뜩 긴장되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 한다.

“조금 전엔 미안했어요.”

“……네? 아니, 아녜요.”

“너무 갑작스럽게 군 것 같아서.”

“아뇨, 저도 죄송해요. 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라고 오해했어요.”

“아버지의 부탁이요?”

하지만 라비엘리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호기심이 앞서 물었지만, 낯선 이와 나누기엔 적절하지 못한 주제였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하지만 레브리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을 시작했다.

“아뇨,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갑자기 나타나서 제 아버지라고 우기는 중인데다, 산더미 같은 빚을 갚아달라며 행패나 부리는 사람이에요.”

“뭐라고요?”

라비엘리는 더는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제가 너무 과한 반응을 보인 건 아닌가 싶었으나 참을 수가 없었다.

“사, 산더미 같은 빚이라니. 아버지가요?”

“네, 그런데 저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저 제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어머니에 관한 걸 잘 알고 있어서 믿을 뿐이에요.”

라비엘리의 가슴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나뭇가지로 배 속을 휘젓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정작 레브리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라비엘리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르휜 양이라고 하셨지요?”

“네, 그냥 라비엘리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아아, 그럴 수는 없죠.”

레브리안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라비엘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족처럼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남루했지만 앉아 있는 자세나 표정 등에서 흐르는 기품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저는 편하게 레브리안이라고 부르세요. 아니, 레비라고 부르셔도 좋아요.”

레브리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그저 미소만 보였다.

“그래도 이렇게 뒤늦게 나타나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면 정말 괴로웠을 것 같거든요. 정말 최악이었을 거예요.”

그녀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렸을 때는 어땠나요?”

“어머니는 늘 몸이 아프셨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셨어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좋은 사람이라니 다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동안 이야기 속에 빠져 제 어린 시절을 늘어놓던 레브리안이 어딘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저 혼자 떠들고 있네요. 궁금하지도 않으신 이야기를.”

“아녜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르휜 양, 조금 전에 제게 하시려던 말씀이 무엇인가요?”

내내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있던 라비엘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라비엘리의 가슴은 가쁘게 뛰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기대감일까, 아니면 본능적인 예감일까.

“저는 롭에서 왔어요. 롭은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하고 살기 좋은 땅이에요. 그곳에서 부모님과 아주 오랫동안 살았고요.”

레브리안은 라비엘리가 왜 저를 보며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동화되어 잠자코 있었다.

“어린 시절은 어딘가 우울한 기억의 연속이에요. 다섯 살 무렵은 전부 흐릿하고요. 하지만 완전히 기억하는 단 한 가지가 있는데, 그건 아주 어린 동생이 사라진 일이에요.”

“동생을요?”

그 시절, 유모나 하녀가 아이를 훔쳐다 파는 일이 종종 있었다. 때문에 유모를 고용하는 일이 몹시 까다로워졌고, 집사를 구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은 자식이 없는 귀족가에 넘겨지거나 주술사, 혹은 마녀의 제물이 되었다.

“세상에,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때 잃어버린 제 동생이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 스무 살이 되었을 거예요.”

“아, 동생이 있었다면 저와 나이가 같았겠네요.”

라비엘리는 레브리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루즐 양, 혹시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어요?”

“저요?”

“네.”

“……그러니까 저는.”

레브리안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가 열다섯이 되던 해 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저는 홀로 신전에서 잡일을 도우며 지금껏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지만, 그간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전부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레브리안이 제 동생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힘들었겠어요. 아주 많이요.”

“전부 지난 일인 걸요.”

라비엘리는 이제 지금껏 가슴에 품어 온 말을 꺼내야 할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루즐 양.”

“네.”

“신관님께서 저를 데려오신 이유가 궁금하죠?”

라비엘리의 말에 레브리안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을 때였다.

“절 여기로 데려오신 이유는 당신 때문이에요.”

“저 때문이라고요?”

“나는, 그리고 신관님께서는 당신이 르휜 가에서 사라진 아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네?”

레브리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연신 팔을 매만지며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다.

“말도 안 돼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겐 어머니가 계신걸요. 한심한 사람이긴 해도 아버지도 계시고요.”

“루즐 양.”

“물론 당신과 제가 무척 닮았다는 건 인정해요. 저도 처음 뵈었을 때 조금 놀랐으니까. 그런데 닮았다고 해서 제가 당신의 잃어버린 동생이라는 건 조금.”

레브리안은 혼란스러운지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제 어머니는 누구란 말인가.

아이를 훔쳐 온 유모일까,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저를 사거나 주워다 길렀다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가난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지낸 시절은 행복했다.

어머니는 저를 길러내려 아픈 몸을 이끌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을 했다.

그런 어머니의 헌신이 전부 거짓일 리 없었다.

레브리안은 도저히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 오는 내내 생각했어요. 만약 동생이라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너무 어린 나이에 잃어버려서 서로를 기억할 수도, 증표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르휜 가는 엉망이 되어버렸고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어요.”

“…….”

“그런데 얼핏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라비엘리는 피가 돌지 않을 만큼 제 손을 꼭 쥐며 말을 이어갔다.

“아이가 사라지기 직전, 기르던 고양이가 아기의 발을 할퀸 적이 있어요. 어머니께서 흉이 질까 봐 몹시 걱정하셨고요. 어린 마음에도 시어도네에게 미안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는데.”

“…….”

“혹시 발에 상처 같은 거.”

라비엘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레브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해요. 저 발에 상처 같은 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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