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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92)화 (92/136)

92화

루시안은 곧바로 말을 타고 오스트린의 상점 거리로 나왔다. 그는 알레의 속도를 늦추며 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면면과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신전이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대체로 조용했다. 루시안 역시 차분히 말을 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어느 작은 상점을 발견하고는 말에서 내려왔다. 갈라지고 뒤틀린 나무 간판을 힐긋 올려다본 루시안은 망설임 없이 작은 문을 밀었다.

딸랑- 

문이 열리자 낡은 외관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종소리가 울렸다.

루시안이 종을 확인하려 머리를 든 사이, 안에서 졸고 있던 노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안녕하세요.”

루시안을 맞이한 잡화점 주인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열댓 평 정도 크기의 공간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물건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아무래도 주인은 이 가게와 함께 세월을 먹고 늙어간 모양이었다.

사방에서 풍기는 퀴퀴한 곰팡내에 헛기침을 한 번 하자,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시게.”

“종이와 펜을 사려고 하는데 혹시.”

노인은 루시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잘라 먹었다.

“종이? 어떤 종이.”

“편지를 쓸 만한 종이면 됩니다.”

“아, 그럼 그렇게 말을 해야지. 여기 종이 종류가 한두 갠 줄 아시오?”

노인은 비쩍 마른 얼굴을 두어 번 쓸며 돌아서더니, 적당한 크기의 종이를 하나 꺼내왔다. 그러더니 봉투와 함께 내밀었다.

“이 정도면 되겠소?”

“네, 딱 좋습니다.”

루시안이 대답하자 노인은 다시 흡족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마른 먼지와 물에 젖은 종이 냄새가 폴폴 피어났다.

‘라비엘리를 데리고 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그가 눈으로만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노인이 깃펜을 서너 자루 찾아와 내밀었다.

“나오는 걸로 아무거나 가져가시오.”

루시안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며 웃었다.

‘장사 재미있게 하시네.’

“다 해서 얼마입니까?”

“종이는 3크랜, 펜은 7크랜.”

“여기 있습니다.”

루시안이 10크랜을 내밀자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돈을 받아들었다.

“여기서 잠깐 편지를 쓰고 가도 괜찮을까요?”

“맘대로 하시오.”

그러더니 노인은 책상 아래에서 잉크를 하나 꺼내 루시안 앞에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루시안은 책상 위에 놓인 잡동사니를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밀어내고는 편지를 쓸 자리를 만들어냈다. 그런 다음 낡아빠진 깃펜 머리를 잉크에 푹 담갔다 뺐다.

그러는 사이 노인은 다시 잡화점의 일부가 되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던 펜이 점점 느려지고 종이의 빈 곳이 얼마 남지 않자, 루시안은 돌연 라비엘리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만약 혼자 두고 나와야 했다면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로제의 존재가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한 장을 꽉 채운 루시안은 편지를 반듯하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어르신.”

그가 다시 목소리를 내자 나른히 졸던 노인이 눈을 뜨더니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인근에 심부름을 해 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루시안의 말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비적비적 걸어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 낡고 오래된 잡화점의 케케묵은 먼지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심부름이라면 편지를 전달할 사람 말인가?”

“네, 맞습니다.”

노인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루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기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에서 오셨소?”

그의 질문에 루시안은 그저 온화하게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적당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거라면 면사무소에서 잡일을 하는 사내가 한 명 있네만.”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비용은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루시안의 말에 노인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말했다.

“50크랜은 줘야 움직일 것 같소. 그리고 내 수수료는 5크랜이요.”

“알겠습니다.”

노인은 루시안이 고민 없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제가 너무 적은 금액을 부른 건 아닌가 잠시 후회했다.

“오후에 여기 들른다고 했으니 그때 전달해도 되겠소?”

“네, 오늘 안으로만 출발해주면 좋겠군요.”

루시안은 노인이 말한 것의 두 배를 내밀었다.

노인은 편지와 돈을 받아 들고는 영수증을 하나 적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그리고 이 근방에 약재상이 있을까요?”

이번 질문에 노인은 처음보다 훨씬 온화해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어떤 걸 찾으시오?”

“약재처럼 보이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루시안의 대답에 노인은 느릿하게 눈을 끔벅였다.

어딘가 이상하게 들리는 대답이었다. 더하여 사내 역시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여기에도 잔뜩 있네만.”

노인은 다시 아래 칸에서 말린 것인지 썩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약초를 잔뜩 꺼내 내밀며 덧붙였다.

“멀쩡해 보이는 걸로 아무거나 가져가시오.”

* * *

“맙소사.”

로제는 저도 모르게 신음 같은 탄성을 흘렸다.

그들의 시선은 제 키만 한 빗자루를 들고 비질을 하는 여인에게로 향해 있었다.

차림을 보아 얼핏 신전에서 일하는 하녀처럼 보였다.

“아가씨, 저분.”

당황한 탓에 뒷말을 더듬는 사이, 라비엘리의 시선도 하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볼록한 이마와 곱게 뻗은 콧날, 은가루를 뿌린 듯 화려하고 아름다운 백금발색 머리카락까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저와 꼭 닮은 모습을 마주하자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머니의 잔상이 피어났다.

금실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라비엘리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하녀에게 다가갔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하녀의 비질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가씨.”

로제의 목소리가 라비엘리의 등을 건드렸으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녀에게 걸어가는 내내, 라비엘리는 주먹을 꼭 쥐고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턱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감정을 애써 누른 라비엘리가 열심히 비질 중이던 하녀 앞에 섰을 때였다.

“……저.”

누가 걸어오는지도 모르고 비질을 하던 레브리안이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 네.”

레브리안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동작을 서서히 멈추고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어?’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뭐 필요하신 게 있으세요?”

반사적으로 물었으나 낯선 얼굴이었다. 그러나 누구인지 생각하기 무섭게, 레브리안은 여인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 피부와 푸른색 눈동자, 길고 곱슬곱슬한 금색 머리카락까지.

레브리안은 늘 제 금색 머리카락이 제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무례한 이들은 종종 그 사실을 레브리안 앞에서 입에 올리기도 했다.

제 머리카락 색은 그저 신의 실수라고만 생각해왔다. 지금 눈앞에 선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니 그 사실이 더욱 와닿았다.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지만, 여인에게는 금색 머리카락이 아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여인의 얼굴을 마주하면 할수록,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

“저, 그러니까.”

레브리안이 속으로 도리질을 치는 사이, 라비엘리는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워낙 오래전 일인 데다 설령 동생이 맞다고 해도 어떻게 확인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라비엘리가 무어라 말문을 열지 못하고 주저하자 레브리안이 되물었다.

“미안해요. 저는 라비엘리 르휜이라고 해요.”

라비엘리는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두어 번 문질렀다. 그러고는 표정을 정돈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네. 저는…….”

저도 모르게 빗자루를 붙든 손에 힘을 주며 레브리안이 입을 열었다.

“저는 레브리안 루즐이에요. 아가씨, 혹시 뭐 필요하신 게 있으세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루즐 양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레브리안의 입장에서 라비엘리는 완전히 낯선 여자일 뿐이었다.

게다가 어딘가 기분 나쁘게 저와 꼭 닮은 얼굴- 

아무리 생각해도 여인이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이유를 추측할 수 없던 찰나였다.

‘잠깐만. 혹시 아버지와 관련 있는 사람인가?’

신전에서 행패를 부리다 쫓겨난 이후, 그는 이곳에 더는 걸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더미 같은 빚이 사라질 리는 없는 것- 에몬과의 결혼 역시 결정하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혹시 아버지나 에몬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아, 저는 지금 일을 해야 해서요.”

레브리안이 경계하는 눈을 하자, 라비엘리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그래요. 그럼 일이 끝난 시간에…….”

“아뇨, 지금 일이 좀 많아서요.”

불길한 상상을 한번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만약 아버지 대신 제게 빚 독촉을 하러 온 사람이라면, 에몬을 대신해서 온 사람이라면.

레브리안이 불안함에 뒤로 물러서고 있을 때였다.

대신관을 만나러 갔던 클라인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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