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먼저 출발한 테아노는 생각보다 빨리 신전에 도착했다.
그는 짐을 풀기도 전에 곧바로 태황후의 상태부터 살폈다.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테아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특기할 만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탁-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테아노는 목을 조이던 셔츠를 느슨하게 당겼다.
“후작님, 가방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는 뒤따르던 하인에게 손에 든 진료 가방을 무심히 건넸다.
‘초대, 초대라.’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라비엘리를 생각했다.
감히 제게 대석학의 꼬리표니 뭐니를 운운하다니.
말은 그렇게 해도 분명 두려웠을 것이다. 창백해진 입술과 사시나무처럼 떨던 어깨가 그녀를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젠장, 그 비싼 약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테아노는 주먹이 터져라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일을 생각하자 열이 올라 눈과 이마가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분에 못 이겨 라비엘리의 뺨을 갈기긴 했으나 후회스럽기도 했다.
분명 벌겋게 부어올랐을 테고 행여 제가 손찌검을 했다는 걸 말하지는 않았을지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테아노를 불편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신관이 무슨 연유로 라비엘리를 초대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라비엘리를 부를 이유가 없었다.
신에게 일생을 바친 사내니 여인으로 마음에 둔 것은 아닐 테고, 라비엘리에게 신성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라비엘리의 가문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일까.
‘그것도 뭔가 이상한데.’
자카린타스 성의 딸이었다는 것을 알고, 롭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를 알아도 지금과는 상관이 없지 않은가.
과거에 연이 있다고 해도 신전으로 부를 필요까지는 없을 터인데.
‘부모님을 위해 기도를 드리겠다는 게 목적은 아닐 거야.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하인이 테아노의 방 앞에 섰다.
테아노는 하인이 내민 진료 가방을 건네받으며 지친 음성을 냈다.
“뜨거운 물을 좀 준비해 주게.”
“네, 후작님.”
하인이 투박한 걸음 소리와 함께 사라지자 테아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새 온기가 식어버린 방 안을 둘러보던 그가 테이블 위에 진료 가방을 내려놓았다. 성격대로라면 곧바로 가방을 정리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바로 잠들 수 있을 만큼 심신이 지쳐있었다. 더하여 방 안에는 그가 숨을 내쉬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우리 가문에도 꽤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세요. 아버지, 당신의 보살핌을 받는 여인이 하녀 한 명 없이 그 먼 곳까지 간다면, 모두가 후작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버지라.
무기력하던 얼굴에 희미한 살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녀석이 조곤조곤 내뱉은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더하여 전부 저를 위해 하는 말처럼 들렸으나 사실은 라비엘리를 위함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뱀처럼 간교한 자식, 녀석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살려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후회가 되었다.
저를 선망하는 의사의 기대감 따위는 저버리면 그만이었는데. 고작 잠깐의 수치스러움이 두려워 그 교활한 녀석을 살려두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다니.
‘아냐, 나중에라도 녀석이 내 아들이었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렇다면 정말 곤란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루시안이 그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러다 조금 불편한가 싶더니, 이제는 녀석을 견딜 수가 없었다.
‘먼저 선을 넘은 건 그 녀석이야.’
라비엘리의 반항쯤이야 저택으로 돌아가면 금방 잠재울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기로 저를 협박하고 있지만, 집에서는 조금도 먹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루시안은 다르다.
‘무슨 수를 내긴 해야겠는데.’
불편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거나 남의 손을 빌어야 할 때면, 테아노는 어김없이 에몬을 부르곤 했다.
에몬은 발이 넓은 사업가인 덕분에 그간 테아노의 일을 막힘없이 처리해왔다.
하지만 누군가를 처리하는 방법도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거기다 한두 푼으로는 될 것 같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에몬과 오랜 시간 거래하며 신뢰를 쌓아온 건 맞다.
하나 살인을 사주했다는 게 이후의 거래 등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는 타고난 장사꾼이 아닌가.
손익 계산이 확실한 만큼 책잡힐만한 일은 맡기지 않는 게 나았다.
에몬을 거치지 않고 제가 처리한다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자 벨라도나와 티티에의 맵고 진한 향기가 몹시 당겼다.
테아노는 비틀비틀한 걸음으로 걸어가 서랍 속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한 움큼 꺼내든 벨라도나를 코 아래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천천히 눈을 감자 나른한 동시에 야릇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하…….”
역시 방법은 에몬뿐인가.
그래,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역시.
그때 불현듯 테아노의 머릿속에 루시안의 음성이 지나갔다.
‘에몬 씨께서 이미 새로운 하녀를 보냈습니다. 후작님도 아는 여인이던데요. 조금 전 나간 빨간 머리 아가씨가 앞으로 이 여관을 관리할 겁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에 도도하게 웃던 그 여인.
사내를 휘두르는데 여인의 웃음만큼 효과가 좋은 건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으니, 루시안을 넘어뜨리는 것 역시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잠깐, 그 여자 이름이 뭐였지?’
테아노는 밤새 티티에를 씹으며 뒹굴었던 여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름이야 뭐든 상관없지. 당장 그 여자에게 연락해야겠군.’
그러는 사이 테아노의 의식은 점점 더 짙은 환각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아예 소파에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즐거운 환상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 * *
라비엘리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오스트린에 도착하였다.
로제는 연신 커다래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고, 라비엘리는 가벼운 기대감과 불안이 뒤엉킨 모습이었다.
“라비엘리, 로제와 여기 있어요.”
루시안은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마을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했다.
“여기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마을에는 왜요?”
“아.”
라비엘리의 물음에 루시안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팔이 아직 불편해서. 약재상에 좀 다녀올까 합니다.”
생각해보니 루시안의 몸 상태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그럼 신관님께 먼저 여쭤보시는 건 어때요?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이 안에 있을 것 같은데.”
“됐어요. 신전에도 물론 있겠지만, 여기서 약초까지 축내고 싶지는 않거든요.”
어차피 말린다고 해서 들을 사람도 아니었다. 루시안이 나간 사이 라비엘리는 로제와 단둘이 남아 신전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가씨, 혹시 신께 기도드리고 싶으신 게 있으세요?”
로제의 질문에 라비엘리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신이 제 음성을 들어준다면 물론 빌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축복을, 제가 사랑했으나 지상에 없는 이들의 안녕을 말이다.
“로제는요?”
“저는…….”
생각에 잠긴 탓인지 로제의 걸음이 다소 무거워졌다.
신이 들어준다고만 한다면 빌고 싶은 건 끝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신전에서는 어쩐지 말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로제, 말하기 어려운 거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요 아가씨. 돈이 아주, 아주 많았으면 좋겠어요.”
“돈이요?”
“네.”
로제의 대답에 라비엘리가 가볍게 웃었다.
“뭐예요. 그게 다예요?”
“아가씨, 그게 다냐니요. 맞아요, 돈이 전부예요. 돈만 있다면 못 할 게 없는걸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로제가 한껏 들뜬 얼굴을 했다. 라비엘리는 그런 로제가 귀여워 어쩐지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서운하네요. 나는 로제의 건강과 행복을 빌고 싶었는데.”
“예에? 뭐라고요?”
로제는 입을 쩍 벌리고는 손을 마구 내젓기 시작했다.
“아녜요, 아가씨. 저도, 저도 아가씨의 행복을 제일 먼저 빌 거예요. 사실 돈은 그다음 문제라고요.”
“로제 마음 아주 잘 알았어요.”
“아이, 참!”
얼굴까지 빨개져선 동동거리는 로제가 귀여웠다.
‘루시안이 이런 기분인가.’
라비엘리는 농담하던 와중에 그를 떠올린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로제를 놀리는 걸 그만두고 방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던 찰나였다.
“어?”
로제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라비엘리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