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뭐긴 뭐야,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거지.”
“…….”
“그나저나 로제는 안에 있는 거지? 기는 팍 죽여 놨어?”
마우드는 지폐를 구기려다 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건 용돈이겠지. 극장에 후원하겠다는 말까지 장난처럼 넘기지는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에몬은 사업하는 사람이 아닌가.
사업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신뢰다.
게다가 사랑까진 아니어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 분명하니까.
극장이 문을 닫고 내가 일자리를 잃는 건 그도 원치 않을 것이다.
“알았어, 그럼 극장에 후원은 어떤 식으로 할 거야?”
다만, 에몬은 변덕스러운 면이 있으니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았다.
마우드는 나오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짜냈다.
“응? 어떻게 얼마나 해 줄 거냐고.”
“마우드, 자기야.”
에몬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가는 게 느껴질 만큼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문을 열었다.
“자기네 극장 말이야, 몇 푼 후원한다고 될 게 아니던데?”
“뭐?”
“단장이 지금 여기저기서 돈 끌어다 막는 모양인데 그래선 몇 달 버티기 힘들 거야.”
마우드는 갑작스러운 에몬의 말에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어질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관객 수 줄어든 지 꽤 된다면서. 이제 오페라는 무리야.”
“에몬.”
“단장은 새로운 얼굴을 원하던걸. 원래 대중은 그렇잖아. 늘 신선한 걸 원하지. 물론 자기도 그럴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에몬은 마우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뭐 퇴물이라는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쨌든 단장은 지금 새로운 얼굴 찾는다고 난리더라고. 그것만이 극장을 살릴 길이라나 뭐라나.”
“뭐?”
“내 생각에는 틀렸어. 그것도 얼마 못 갈 거야.”
“…….”
“자기가 올라가지도 않을 무대에 내가 후원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럴 리 없어. 내가 핵심이고 내가 주연인데 새로운 얼굴이라니. 자기 그거 확실한 말이야?”
“없는 말을 지어낼 이유가 있나. 그러니까 그놈의 후원 타령 좀 이제.”
거기까지 말한 에몬은 마우드의 표정을 살피더니 뒷말을 흐렸다.
“자기, 내가 돈 몇 푼이 아까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
“그러니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마우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원을 못 하겠다고?”
“그래, 방금 돈 줬으니 된 거 아냐?”
열이 오른 탓인지, 아니면 앞머리가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자가 닿은 안쪽 이마가 따끔거렸다.
‘불편해. 불쾌해. 답답해…….’
순간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몹시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지폐를 구겨버리며 에몬을 노려보았다.
마우드의 돌변한 얼굴과 구겨진 지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에몬이 큰 소리를 냈다.
“자기,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냐고? 지금 나더러 뭐 하는 거냐고 물었어?”
마우드는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날리고는 에몬을 쏘아보았다.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여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설마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
그녀가 매섭게 쏘아붙이자 에몬은 짐짓 당황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응? 아아, 그래 가방 이리 줘, 무거운 거 못 들잖아.”
에몬은 마우드의 가방을 들어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손에 세게 힘을 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모른 척할 생각 마. 당신 때문에 악마인지 뭔지가 나타나 난리가 날 뻔했는데 다 끝나고 나니까 겨우 나타나서 뭐가 어째? 고작 200 크랜 쥐여 주면서 뭐가 어째?”
“응? 아아, 그것 때문에 화가 잔뜩 났군.”
“그것 때문에?”
“자기도 알다시피 내가 좀 바빠야 말이지. 신관이 부탁한 약초를 대량으로 구하느라 진짜 정신이 없었어.”
“…….”
“그리고 여관에는 내가 믿는 자기가 있으니까 천천히 가봐도 되겠다 싶었지. 응? 많이 힘들었어? 아이고, 우리 예쁜이 얼굴 상한 거 봐.”
“미친놈.”
마우드는 거칠게 쏘아붙이고는 몸을 틀어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뒤따라온 에몬에게 곧바로 잡히고 말았다.
에몬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눈썹을 한껏 내렸다.
“왜 그래, 응? 들어가서 얘기해.”
“더 할 말 없으니까 이거 놔.”
“왜 할 말이 없어. 아 참, 그 하녀는? 자기가 콧대를 잘 눌러놨겠지?”
마우드의 예상대로 에몬은 여관에 사달이 난 걸 알면서 일부러 오지 않았다. 신관에서 사람들이 나왔으니 알아서 해결이 될 거로 생각했다. 어차피 제가 가봐야 도움도 안 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역시 두려움이 가장 컸다. 에몬은 공연히 여관에 갔다가 악마를 마주하거나 저주에 걸리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얼간이인 줄 알았던 바이젤이 그런 짓을 벌일지 누가 알았겠는가.
저주는 명백히 저를 향한 것인데 여관으로 갈 수는 없었다.
“뭐? 콧대?”
“응, 로제는 안에 있나?”
에몬의 말에 마우드는 입꼬리를 치켜들었다.
“그 하녀 아가씨는 없어. 떠났다고.”
“뭐?”
“당신이 그만두라고 했으니 그만두겠다며 가버렸어.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니까 물어보지 마.”
“뭐, 뭐야? 그럼 지금 여관에는 누가 있지?”
“열받은 손님들이 있겠지. 나한테 뭐라고 할 생각 마. 나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 거기 사장은 당신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
에몬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여관을 쳐다보았다.
그때 문이 발칵 열리더니 잔뜩 성이 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등허리에 칼을 찬 사람, 장총을 멘 사람 등 하나 같이 노기에 휩싸인 면면들이었다.
“뭐, 뭐야 지금!”
“뭐긴 뭐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당신 손님들이지.”
“뭐?”
“가서 총 들고 칼 든 놈들 어디 한 번 상대해 봐. 가서 흙 묻은 바지 빨아주고, 수발도 좀 들고.”
“젠장, 이년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년? 이 겁쟁이 새끼가!”
마우드는 지폐를 완전히 구겨 동그랗게 만들어선 에몬의 얼굴에 내던졌다.
“퉤!”
그러더니 바닥에 침까지 뱉은 뒤 성큼성큼 멀어졌다.
에몬은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었지만 사내들의 고함 점점 커지는 바람에 마우드를 쫓을 수 없었다.
이제는 쓰레기처럼 보이는 지폐 뭉치를 냅다 주워든 사이 마우드는 점점 더 멀어졌다.
“젠장!”
마우드는 걷고 또 걸었다. 가방을 움켜쥔 손에 땀이 배고 모자가 닿은 이마는 여전히 따끔거렸다. 그러나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걸음을 멈추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밀물처럼 밀려들까 봐, 조금 전 에몬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일까 봐, 그런 생각들에 잡아먹혀 주저앉게 될까 봐 걷고 또 걸어야만 했다.
‘헛소리야, 전부 헛소리라고!’
후원을 하기 싫으면 차라리 싫다고 말할 것이지 가증스럽게 극단이 어쩌고, 새로운 얼굴이 어쩌고를 찾아?
마우드는 이를 악물고 빠르게 걸었다.
“저 한심한 새끼에게 뭔갈 기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걷는 내내 에몬의 반질반질한 얼굴이 떠올라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금 당장 극장에 달려가 에몬이 남긴 말의 진위를 알고 싶다가도 막상 그게 정말 사실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함께 솟아났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잖아.’
극장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몬이 후원한다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닌가.
그런데 그곳에서 저를 반기지 않는다니.
제 관객은 점점 줄어들고 단장은 새로운 얼굴을 찾고 있다니.
“나쁜 새끼, 한심한 새끼.”
극장으로 가야 하는 걸까.
지금 가서 에몬이 한 말을 풀어 놓고 따져야 하는 걸까.
그랬다가 내 꼴만 더 우스워지는 건 아닐까.
오페라 가수가 되기 전 암울했던 시절의 제 얼굴과 마주했을 때였다.
‘싫어. 난 더는 그렇게 못 살아.’
문득 마우드의 머릿속에 묘한 생각 하나가 스쳐 갔다.
‘가만.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 마우드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더는 이마가 화끈거리지도 모자가 거추장스럽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 사람이 있었지.”
마우드는 걸음을 멈추고 먼발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