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이봐, 식사가 이게 대체 뭐야!”
사내는 딱딱한 콩과 마른 빵이 담긴 나무 그릇을 내동댕이쳤다.
“지금 이걸 먹으라고 내준 거야? 소 돼지도 안 먹을 다 말라비틀어진 빵 쪼가리잖아!”
마우드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릇을 보고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어금니를 꽉 붙이며 참았다.
“하, 미안해요. 하지만 먹을만한 게 없어요. 창고가 텅텅 비었다고요!”
“뭐야?”
로제가 떠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여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식사를 주문하는 투숙객, 빨래를 찾으러 내려온 자들과 청소가 덜 되었다고 소리치는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그 여자는 어디 갔어?”
사내들은 전부 로제를 찾았다.
하지만 로제가 어디 있는지 알면 마우드가 가장 먼저 찾아왔을 것이다.
마우드는 속이 뒤틀리는 걸 꾹 참으며 손에 든 걸레를 쥐어짰다.
“몰라, 몰라. 나도 모른다고요!”
그러는 사이 문이 열리더니 중년 사내 네다섯이 안으로 들어왔다.
투박한 모습의 사내들을 보자 마우드의 가슴이 불길한 예감으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틀만 묵읍시다.”
장총을 어깨에 멘 것이 사냥하러 온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사내들은 장화에 묻은 진흙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비벼 닦았다.
마우드는 흙투성이가 된 바닥을 망연히 쳐다보다 이마를 짚었다.
더럽고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냥꾼들과는 단 1분도 함께 못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아, 미안한데 더는 손님 안 받아요.”
“에? 방이 없나?”
“모르겠고 딴 데 알아봐요. 여기는 문 닫았어요.”
“딴 데를 알아보라니? 여기 말고 여관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저와 상관없는 일을 봐주러 이런 오지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도 화딱지가 나는데, 청소에 빨래에 요리까지 해다 바칠 수는 없다.
“아, 난 모르니까 나가서 사 먹든 굶든 길바닥에서 자든 알아서들 하라고요!”
마우드는 꽥 소리를 지르고는 사람들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러고는 제가 묵던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아래층에선 여전히 마우드를 찾는 소리와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올라왔다.
“아오! 짜증 나!”
마우드는 양손으로 두 귀를 막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코딱지만 한 여관에 해야 할 일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대충 웃음으로 사람들 비위나 맞추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투숙객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여자가 아니었다.
적당한 식사와 목욕물, 청소와 빨래-
마우드는 그것 빼고는 전부 다 해 줄 수 있는데.
“에몬은 대체 어디에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여관에서 사람이 죽어 나갈 뻔했는데도 에몬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있었다면 로제가 나가는 걸 허무하게 보고만은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몰라, 나는 이제 모르니까 알아서 하라고. 내 역할은 이제 끝났어.”
마우드는 구석에 두었던 가방을 꺼내선 제 옷가지와 짐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끼던 비단 장갑도 실크 잠옷도 전부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첫날 쓰고 왔던 챙이 넓고 화려한 모자를 머리에 눌러 썼다.
“이제 끝이야, 끝이라고.”
혹시 두고 간 것은 없는지 방 안을 둘러보지도 않고, 마우드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이 망할 여관이야 나가면 그만이야. 내가 알 게 뭐야?”
그녀가 다시 1층으로 내려오자 사내들은 전부 한 몸처럼 마우드를 올려다보더니 동시에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내 빨래 찾아오라는 말 못 들었어?”
“여기 돈 있으니 열쇠 내놓으라고!”
“뭐야, 어딜 가는 거야?”
마지막 계단을 디딘 마우드는 손에 쥔 가방을 높이 들고 흔들어 보였다.
“오늘부로 그만뒀어요. 나 더는 관리인 아니니까 다들 알아서 해요.”
“뭐?”
“위에 올라가서 아무 빈방이나 찾아 들어가든, 창고를 뒤져서 빵을 꺼내 먹든 알아서들 하라고요. 난 갑니다.”
마우드의 말에 사내들은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사이 그녀는 쿵쿵거리며 걸어선 닫힌 문을 발칵 열고 밖으로 나갔다.
쾅!
문밖으로 나온 마우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만 가 있으라더니. 나쁜 새끼.”
마우드는 가방을 내려놓고는 모자를 벗었다. 아무렇게나 눌러 쓰고 나온 탓에 머리가 영 불편했던 탓이다.
그녀는 가방 위에 모자를 올려두고는 엉킨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했다. 한쪽으로 잘 매만진 뒤 모자를 쓰자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뭐? 허드렛일이 아니라 딱 이틀만 관리 감독하라더니. 지금 이게 관리 감독이야?”
에몬이 극장에 크게 후원한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어쩌면 그에게 제 미래를 기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만 없었어도 이런 외진 곳에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됐어, 후원이고 나발이고. 세상에 널린 게 돈이고 남자지.”
그래, 에몬에게만 기대기에 나는 아직 충분히 젊고 아름다워.
마음을 다잡은 마우드가 턱을 올리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하나 여관에서는 느껴지지 않던 가방의 묵직함에 마우드는 잠시 당황했다.
“며칠 걸레 좀 짰다고 손목이 아리네.”
그때, 멀리서 여관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는 마차가 한 대 보였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꼴이 여관에 오는 모양새였다.
“어휴, 지겨워!”
마우드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멀리서 내달리던 마차가 방향을 틀더니 마우드가 걸어가는 곳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마우드가 반사적으로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마차는 그녀의 길을 막아서며 곧 멈춰 섰다.
“뭐야?”
한껏 예민한 얼굴로 두어 걸음 머뭇거리는데 마차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내렸다.
다름 아닌 에몬 질이었다.
그는 잘 빠진 양복 차림에 앞코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에몬은 마우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마우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마우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성질 같아서는 무릎을 걷어차 주고 싶었으나 그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자기 왜 이제 와. 여관에 얼마나 난리가 났었는지 알아?”
어쨌든 며칠간 고생한 대가는 받아내야 한다. 여기서 있는 대로 화를 냈다간 에몬의 주머니에서 한 푼도 나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아니 내가 노느라 그랬나 바빠서 그랬지, 바빠서. 신관이고 사제고 다 와있다는데 내가 굳이 와야 하나.”
“그래, 자기 대신 내가 있었으니 됐지.”
마우드는 야릇하게 눈을 접으며 에몬의 팔짱을 꼈다.
“그래서 일은 많이 했어? 우리 극장에 후원할 만큼은 벌어온 거지?”
에몬의 팔을 천천히 쓸며 마우드가 간지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래, 고생은 고생이고 돈은 돈이었다. 어차피 시작은 돈 때문이 아니었던가.
마우드는 에몬의 돈이 필요했다.
극장이 문을 닫지 않고 계속 노래할 수 있게 후원을 하든, 단 몇 푼이라도 지금 제게 쥐여 주든 마우드는 돈이 필요했다.
“후원? 무슨 후원.”
에몬은 마우드가 끌어안은 팔로 그녀의 엉덩이를 건드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발끈한 마우드는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애써 참으며 웃었다.
“무슨 후원이냐니. 자기가 우리 극장에 거하게 후원한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어?”
마우드는 에몬의 손을 제 몸에서 떼어내며 눈을 크게 떴다.
“자기,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냐.”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부터 풀고 싶었는데 삭막하게 왜 이래.”
에몬은 능글맞게 웃더니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마차를 타고 달려오며 에몬은 내내 마우드를 침대에 눕힐 생각을 했다.
윤기가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과 뽀얗고 탄력 넘치는 피부를 주무르고 싶었다.
같이 노는 데는 마우드같이 음탕하고 야한 색을 가진 여자가 좋았다. 물론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은 건 우아하고 고상한 황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었지만 말이다.
레브리안과 결혼한다고 해서 마우드를 만나지 않을 건 아니었으니까.
“삭막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 얼마나 줄 거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응?”
마우드는 여관을 한 번 힐긋거리고는 에몬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여기서 말해. 자기도 나도 정확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뭘 말하라는 거야.”
“이거 말이야, 이거. 내가 자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거!”
에몬은 마우드가 연신 돈 얘기만 하자 기분이 상했는지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못이기는 척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지폐 두어 장을 뽑았다. 그러고는 마우드의 손에 척, 소리 나게 쥐여 주었다.
“이게 뭐야?”
마우드는 얼빠진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됐지? 빨리 들어가자. 나 눕고 싶어 죽겠어.”
“이게 뭐냐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건 고작 100크랜짜리 지폐 두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