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88)화 (88/136)

88화

“뭐라고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발에 채는 돌멩이와 허청대는 억새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이는 없었다.

“다시 말해줄까요?”

라비엘리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루시안이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물론 후작가에 있을 때보다는 나았지만 루시안과 함께하는 동안엔 늘 사건의 연속인 탓에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라비엘리는 피로했지만, 전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는 루시안이 어떤 사람인지가 더욱 중요해졌다.

루시안 마이어는 말뿐인 사람이 아니다.

얼핏 가벼운 농담이나 내뱉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루시안을 설명할 수 없다.

루시안은 웃는 얼굴로 사람을 둘이나 죽였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악마에 맞섰다.

마검에 찔렸다가 살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에게선 일말의 두려움이나 염려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후작을 죽여도 되겠냐고 묻고 있다.

라비엘리는 조금 전 테아노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 큰 공포를 느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어쩐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처럼 루시안을 만류할 수도, 미친 게 분명하다는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라비엘리, 왜 아무 말도 없어요?”

감정이 묻어나지 않은 목소리로 루시안이 물었다.

그저 라비엘리가 걷는 방향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라비엘리의 왼쪽 뺨을 보고 있었다.

당황한 탓에 라비엘리는 그의 선득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신 정말.”

라비엘리는 눈썹을 주춤거리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도 쉬이 할 수 없었다.

‘진심일까?’

라비엘리는 제 마음이 하는 소리를 외면하려 애쓰고 있었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감정 탓에 가슴이 뛰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감에 마음이 복잡했다.

이상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머릿속으로는 끔찍한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내면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라비엘리는 결코 좁힐 수 없을 그 간격 사이에서 괴로워할 뿐이었다.

‘아니, 이러다 루시안이 정말 후작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건 단순히 사람을 살해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범죄보다 더한 패륜- 게다가 이런 식으로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를 과연 제가 믿을 수 있을는지도 의문이었다.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라비엘리가 매서운 눈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하지만 루시안은 예상했다는 듯 얄궂게 웃었다.

“재밌네.”

그의 말을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라비엘리가 되물으려던 찰나였다.

루시안이 눈가에 스며 있던 미소를 지우며 다시 말했다.

“왜 머뭇거렸어요?”

“…….”

“방금 망설였잖아. 왜? 마음이 조금 흔들렸어요?”

그의 말에 라비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차라리 얼굴이 붉어져서 다행이었다. 그 안에 숨긴 새카만 속내는 보지 못할 테니까.

“왜요, 생각만 한 건데 그럴 수도 있지.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 수백 번 죽여도 어차피 상관없잖아요.”

“…….”

“설마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누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처음부터 마이어가에서 무기력하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눌리다 그것이 분노로 바뀌었고, 울분을 주체하지 못하던 시간에는 늘 테아노의 죽음을 상상했다.

그를 2층에서 밀어버리고, 수프에 독을 타고, 그의 서재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권총을 꺼내 쏘아 죽이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지글대며 타오르던 분노는 전부 재가 되어 날아가고, 무기력만이 울음 속에 남았다.

“생각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자책하지 말아요.”

“누가 자책을 했다고 그래요?”

“이렇게 순진해서야 원. 당신에게는 농담도 못 하겠습니다.”

“농담? 농담이라고요?”

“그래요, 당신 표정이 계속 굳어 있길래.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 걱정하면 되겠지.”

“…….”

“우선 동생을 찾은 다음에 다시 생각하죠. 마이어가의 보호든 뭐든.”

루시안이 손을 들어 한 번 으쓱거린 순간이었다.

라비엘리가 걸음을 뚝 멈추더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쪽에서 차가운 기운이 조금 섞인 미풍이 불어왔다. 루시안은 오른손으로 흐트러지려는 머리를 추어올리며 라비엘리를 마주 보았다.

바람이 닿은 부분은 금색으로 빛났고 그렇지 않은 곳은 그늘져 있었다.

“그래요, 루시안.”

라비엘리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향해 서늘한 음조를 내었다.

“죽여요.”

꽉 말아쥔 주먹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처음보다 지금, 테아노에게 맞은 곳이 곱절은 더 아프게 느껴졌다.

오래전 억지로 삭인 감정이 뱃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말린다고 듣지도 않을 테니까.”

“뭐야, 나 포기했어요? 그러지 말아요.”

루시안은 눈썹을 아래로 잔뜩 내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조금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뇨, 처음부터 기대한 적도 없는걸요.”

오히려 다시 장난스레 말을 받는 루시안과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라비엘리는 머리를 돌려 엘던을 한 번 쳐다보고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 순간, 루시안이 라비엘리를 붙잡았다.

해를 등지고 선 사내의 얼굴은 평소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만약 마이어가에 한 명만 남는다면 보호를 받을 겁니까?”

“…….”

“말해봐요.”

“너무 먼 미래의 일은 생각하지 말라면서요.”

라비엘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시안이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오호라, 뭐가 됐든 내가 한 말을 들어준 건 고맙군요.”

“…….”

“그럼 일단 그럴 것으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야겠네.”

그때,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의 어깨가 슬쩍 닿았다.

“알다시피 나는 꽤 계획적인 사람이라서.”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다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당황하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에게 놀림이나 받고 말 것이다.

“후작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산에서 죽인 사냥꾼들과는 완전히 다르다고요.”

“누가 그렇게 쉽게 죽인다고 했습니까?”

루시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억울해했다.

“……그럼?”

“궁금해요?”

그에게 말리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이번에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라비엘리가 루시안을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신, 아직 아들로서 완전히 인정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루시안은 턱 끝을 두어 번 매만지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 당신이 날 도와줘야지.”

“이것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한 건가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띤 채 완전히 작아진 여관 건물을 손짓했다.

“그만 돌아가죠. 지금쯤이면 당신을 끔찍이도 아끼는 하녀 아가씨가 울기 직전일 테니.”

라비엘리는 알고 있었다.

루시안이 이렇게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 * *

엘던으로 돌아왔을 때, 테아노는 이미 여관을 떠나 있었다. 사제들은 출발 준비를 마쳤고 클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제 역시 단출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라비엘리를 찾고 있었다. 모두가 분주한 가운데, 현재 엘던의 주인공인 마우드만이 곤란한 얼굴로 서성였다.

“이봐요, 정말 오늘 떠나겠다고요?”

마우드는 로제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네.”

“아니, 이렇게 갑자기 가는 게 어딨어요?”

“어차피 엘던에서 더는 일을 못 하게 되었는걸요. 이제 당신이 관리자라면서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마우드는 무어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앞니만 딱딱 부딪혔다.

처음부터 엘던의 관리자로 온 건 아니다. 그저 에몬의 부탁으로, 그와의 미래를 꿈꾸고 있었으니 거절할 수 없어서였다.

에몬의 말대로 기나 조금 꺾은 뒤에 다시 눌러 앉히는 게 제 역할이었는데, 하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짐을 꾸려 내려오더니 곧 떠난다고 했다.

“이, 이봐요 로제. 아, 그래! 우리 인수인계 기간이잖아요.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를 알려줘야지요!”

마우드의 말에 로제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하지 말라면서요.”

“……네?”

“먼저 제안하거나 말하는 건 금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렉토르 양이 묻는 것에 대답만 하라고 했잖아요.”

“…….”

“그리고 첫날, 장부도 다 보여드렸고 청소 순서와 투숙객 응대하는 법 등은 다 알려드렸잖아요. 그게 전부예요.”

로제의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당신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 아니잖아요. 이대로 가버리면 남아 있는 투숙객은 전부 어쩌라고요.”

“모르죠, 나야. 어쨌든 당장 떠나라고 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 사장님께서 아시는 날엔 제가 정말 곤란해져요. 아니, 곤란으로 끝나면 다행이게요.”

마우드는 하마터면 에몬의 진짜 속내를 발설할 뻔했다.

“로제, 사실은.”

그때였다. 멀리서 걸어오던 라비엘리가 로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튼 잘해 봐요. 렉토르 양. 사장님이 오시거든 그동안 감사했다고 전해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