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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87)화 (87/136)

87화

지금 입을 열면 감정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았다.

눈매가 떨리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며 라비엘리는 태연히 앞으로 걸어갔다.

“왜 나와 있어요?”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가기에 제법 좋은 시작이었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팔을 쳐다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회복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루시안의 상태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고 가야 할 길은 멀었으니까.

“라비엘리, 당신.”

하지만 애써 목소리를 낸 것이 무색하게 루시안은 서늘한 눈으로 다가왔다.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찢어진 치맛단을 발견했다. 더하여 부어오른 왼쪽 뺨까지.

“어디에 있었어요?”

라비엘리는 그가 단순히 행선지를 묻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냥, 산책했어요.”

조금 전 후작의 방에서 나온 직후, 라비엘리는 바람을 쐬겠다며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로제를 데려가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어쩐지 루시안을 마주하는 게 껄끄러웠던 탓이다.

그는 테아노를 향한 발톱을 숨기지 않았다.

쉴 틈 없이 몰아세웠고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루시안과 얼마간 지내며 그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라비엘리와는 달리, 테아노는 갑자기 돌변한 아들이 무척이나 낯설었을 터다.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그러자 테아노가 그녀에게 뱉어낸 가혹한 말들이 떠올랐다.

‘말해봐, 응? 약 발라주다 정분이라도 났어?’

치밀한 루시안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고작 하녀를 데려가겠다는 말에 너무 많은 사족을 붙인 것.

테아노는 저와 루시안의 사이를 의심할 것이다.

‘아니, 이미 의심하고 있어.’

라비엘리는 맞닿은 오른쪽 치아에 힘을 한 번 주었다 풀었다.

‘왜 신께서는 저런 형편없는 사내에게 그리 큰 능력을 주신 걸까.’

몸에 힘을 주고, 신을 원망하는 것으로 진절머리 나는 테아노의 음성을 지워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루시안 마이어와 정말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맞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산책?”

“네, 조금 걷고 싶어서.”

“그래서 만족스러운 산책이었습니까?”

“네.”

한 번 마음을 먹자 그다음은 조금 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럼 조금 더 걷다 들어가죠. 어때요?”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슬그머니 그녀의 행로를 막아섰다. 그러고는 무척 자연스럽게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래요.”

“오스트린에는 가 본 적이 없는데. 기대되네요.”

“네.”

“알레는 내가 타고 갈 테니, 당신은 마차로 와요.”

“팔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말을 탈 수 있겠어요?”

“내 팔에 무슨 일이 있었나?”

루시안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내가 뭐라 해도 당신 뜻대로 할 테니까.”

라비엘리는 조금 전 일을 루시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루시안은 이미 제가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는 걸 알고 있고, 그녀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알았다.

가슴이 쓰린 것을 보면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동정 어린 시선은 받고 싶지 않았다.

“뒤쪽은 가 본 적이 없는 것 같네. 좋은 볼거리라도 있습니까?”

루시안이 라비엘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아뇨, 그냥.”

라비엘리는 그도 한번 가봐야겠다고 할까 봐 겁이 났다.

지금 다시 가 본다고 테아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곳에 제가 흘린 감정의 부스러기가 남아 있을 것만 같아, 그것을 밟고 지나는 순간 루시안에게 의지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라비엘리.”

루시안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무엇을 물어도, 결코 솔직하게는 대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는데 뜻밖의 질문이 날아왔다.

“만약 신전에서 만난 여인이 동생이 맞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갑작스럽게 바뀐 화제가 다행스러운 동시에 당혹스러웠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다. 그 아이를 찾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원했으면서, 정작 미래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니.

아니, 라비엘리는 바람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의 크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비엘리가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자 루시안이 처음보다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되물었다.

“혹시 생각해 둔 게 있습니까?”

라비엘리는 불편한 공기를 잔뜩 머금었던 입을 겨우 열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작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자 흐릿하기만 했던 방향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혼란한 가운데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더는 마이어 가에 있지 않겠다는 사실.

당장 독립할 수 있는 돈도 무엇도 없지만 후작과는 같은 공간에 살지 않겠노라는 마음뿐이었다.

동생과는 절대 그 지옥 같은 소굴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마이어 가의 보호를 계속 받고 싶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불쑥 치민 화를 참지 못했다.

“뭐라고요? 보호요?”

그녀의 격한 반응에도 루시안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침볕을 받은 탓인지 유난히 붉은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눈동자를 외면하며 라비엘리가 다시 말했다.

“보호라니, 정말 우스운 말이네요.”

“그런가요?”

“정해진 건 없지만 그 아이와 마이어 가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라비엘리의 대답에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왜? 마이어 가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텐데.”

“…….”

“당장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을 텐데 계획이 있습니까?”

“그건 동생을 찾은 뒤에 고민하겠어요. 공연히 먼 미래까지 그리면서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는 싫으니까.”

그녀의 말에 루시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비엘리. 나는 어쩐지 그곳에 당신의 동생이 있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어요.”

“…….”

“그리고 내 예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요.”

라비엘리는 제 발끝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어쨌든 그 아이에게 부담은 되고 싶지 않아요. 우선은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지요.”

“생각?”

“일을 해서 돈을 벌 거예요. 청소를 하든 농사를 짓든 뭐든 할 수 있는 걸 하겠어요.”

라비엘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루시안이 갑자기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음이 터질 순간이 아니었는데.

라비엘리는 당황스러움을 넘어 불쾌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아,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순진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있어야지.”

“뭐라고요?”

“이봐요, 레이디. 그래, 좋아 일을 한다고 칩시다.”

“…….”

“당신 그럼 로제는 어쩔 셈이에요?”

루시안의 질문에 라비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동생을 찾은 뒤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요?”

“동생을 찾으면 로제는 버릴 거예요?”

“……버리다뇨.”

“그럼 허리가 굽도록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손이 부르트게 청소하면서 하녀까지 부양할 생각입니까?”

그 말에 라비엘리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괜한 짓을 한 것일까. 제 처지도 생각하지 못하고 공연히 로제를 데려간다고 말한 걸까.

이렇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홀로 설 생각을 했다니.

라비엘리는 막연히 희망만을 생각했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순진한 아가씨, 잘 생각해 봐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루시안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

“마이어 가의 주인이 그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무어라 대꾸하진 않았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루시안 마이어. 현재로선 그가 테아노의 유일한 후계였다.

게다가 테아노가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 생기면 마이어 가를 대표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그였다.

라비엘리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앞으로 걸어가자 루시안이 따라붙으며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잘 생각해 봐요. 두 명이잖아.”

라비엘리가 걸음을 멈추고 루시안을 돌아보자 그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더러 당신의 보호를 받으라는 건가요?”

“아니.”

그가 제 후견인이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한폭탄처럼 위태롭고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사내가 아닌가.

루시안은 어쩌면 테아노보다 훨씬 위험한 자일지 몰랐다.

그는 마치 라비엘리에게 숨기는 것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굴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작 그에 대해선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전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주제와 어떻게든 라비엘리의 입을 열게 하려고 덫을 놓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됐어요. 이만 들어갈게요.”

루시안은 순식간에 웃음기를 걷어내고는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고작 한 걸음 가까워졌을 뿐인데 느껴지는 사내의 체온.

더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야릇한 향기에 입술을 꾹 붙인 순간이었다.

“라비엘리,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후작가의 마이어는 두 명이잖아.”

그가 라비엘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 명을 죽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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