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잔뜩 겁을 먹은 탓인지 두 다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라비엘리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혹은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뿐이었다.
“왜, 어제처럼 굴어보지그래?”
그 순간 테아노는 라비엘리의 손목을 움켜잡더니 그녀를 끌고 여관 뒤쪽으로 걸어갔다.
“아……!”
뿌리쳐야 했다. 아니면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목구멍에 돌덩이를 집어넣은 것처럼 아무 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좁은 골목을 따라 얼마간 들어가자 폐가구를 잔뜩 쌓아놓은 공터가 나왔다.
마구잡이로 자란 덤불, 쓰레기로 난장판인 곳에 다다르자 테아노가 라비엘리의 손목을 놓았다.
라비엘리는 벌게진 손목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오랜만이야, 그렇지?”
하지만 라비엘리의 눈빛은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 테아노는 잔뜩 얼어붙은 여인에게로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귓전에 닿는 뜨거운 입김,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씁쓰레하고 기름진 향기.
머릿속에 각인된 냄새가 밀려오자 라비엘리는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처럼 위태로운 얼굴이 되었다.
“그렇지, 그래. 그렇게 얌전하게 있어야지.”
“…….”
“어제처럼 뿔난 망아지같이 굴면 곤란해.”
테아노는 이제야 라비엘리의 얼굴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그는 손을 뻗어 매혹적인 금색 머리카락 끝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코에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흠.”
라비엘리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의 손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라비엘리의 우아한 턱선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테아노가 말했다.
“사실 여기서 만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닮은 여자인가, 다른 사람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
“…….”
“하지만 이 향기를 보니 라비엘리가 맞는군. 나의 라비엘리. 나의 아름다운 여인…….”
테아노는 비릿하게 웃으며 라비엘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대로 인사하자는 거야. 우리 인사를 못 했잖아.”
“그만, 그만하세요!”
“네게 궁금한 게 많아. 오스트린에 가서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걸 두고 참을 수가 있어야지.”
가슴이 불쾌하게 요동친다.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어 보지만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약은 전부 다 발랐나? 응?”
테아노의 말에 라비엘리는 피 맛이 돌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루시안 그 녀석이 제대로 했어? 대답해 봐.”
“…….”
“가만, 설마 그놈이랑.”
테아노의 머릿속에 루시안의 매끈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내가 보기에도 분명 매력적인 외모긴 했다. 우유처럼 희고 뽀얀 피부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낮은 중저음, 게다가 능구렁이 같은 화법과 풍부한 표정을 생각하자 뱃속이 뒤틀렸다.
“말해봐, 응? 약 발라주다 정분이라도 났어?”
“…….”
“젊은 놈이 다리 사이에 있으니 좋았어?”
“…….”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확인해볼까?”
“이거 놔요!”
라비엘리는 거칠게 반항하며 그를 밀어냈다.
테아노가 이토록 대범하게 굴 수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오래전 에몬에게서 여관 뒤에 만들어 놓은 공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폐가구를 쌓아놓아 소리가 잘 새어 나가지 않고 일부러 나무와 덤불을 관리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기서 누구와 재미를 보았는지는 당시엔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단지 푹신한 침대를 두고 굳이 밖으로 나온 녀석의 괴벽한 취미를 듣고 혀를 끌끌 찼을 뿐이었는데.
오늘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잊지 마, 넌 내 거야.”
라비엘리는 주춤거렸지만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마이어가를 벗어난 순간부터 늘 두려워했던 일이었다. 언젠가 테아노는 마주한다면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거라 예상하지 않았던가.
하루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또 다른 날은 억지로 잊으며 이겨냈다. 그러다 이따금 선득한 음성이 되살아나 무너졌고, 어떤 날에는 뭐든 맞설 수 있을 것처럼 마음이 단단했다.
쓰러졌다가 일어서길 반복하는 동안 라비엘리의 가슴 한편에는 늘 그가 있었다.
‘루시안.’
그에 대한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를 의지했다는 사실이었다.
루시안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라비엘리는 더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바로 섰다.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과거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더는 껍데기만 남아 영혼을 좀먹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아뇨, 안 했어요.”
말하는 동안에도 온몸의 맥박이 요란하게 뛰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심장이 터져버릴 거 같았다.
겨우 두 마디를 내뱉는데 이렇게나 감정 소모가 심하다니-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뭐?”
“약을 바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고요.”
라비엘리의 말에 테아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안 했다고?”
“버렸어요.”
“뭐, 뭐야?”
테아노의 두 눈은 앞으로 쏟아질 것처럼 벌겋게 부풀었다.
“그 한심하고 바보 같은 약은.”
찰싹-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라비엘리의 뺨을 때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분노로 꽉 막혀 말소리가 단번에 나오지 않았다.
“후작님께선 여길 아무도 모를 거로 생각하시나 보죠?”
맞은 뺨에선 맥이 뛰기 시작했고 눈물이 샐 만큼 아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분노를 드러내자 라비엘리는 침착해지고 있었다.
“뭐?”
“가엾게도 사람들 눈을 피해 날 여기로 데려왔나요?”
“뭐? 가여워?”
테아노가 미간을 파르르 떨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라비엘리는 그의 눈을 피하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통증은 진해졌지만 어쩐지 더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저와 함께 갈 하녀는 엘던에서 3년이 넘게 일했어요. 제가 보이지 않으니 지금 절 찾고 있을 텐데, 그 아이가 여길 모를까요?”
“뭐?”
“제국의 별, 위대한 대석학이라는 꼬리표가 무거우셨죠?”
라비엘리는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이제 새로운 별칭이 필요하세요?”
그녀는 반대로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라비엘리가 서늘한 얼굴을 하고 앞으로 다가오자 테아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라고?”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고요.”
“라, 라비엘리.”
테아노는 제가 당황했다는 걸 숨기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것으로 속내를 들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미쳤나?’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라비엘리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푸른빛 눈동자는 깊은 심연과도 같아 저를 질식시킬 것만 같아서였다.
“저런, 라비엘리. 좋은 시도였지만…… 내가 고작 하녀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나?”
“여기 하녀만 있다면 문제가 안 되겠지요.”
라비엘리의 말에 테아노가 콧수염 속 입술을 잘근 물었다. 그녀는 그가 머뭇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곧 오스트린으로 가셔야 하지 않나요? 전 클라인 신관님을 기다렸다가 그분과 함께 갈 생각이거든요.”
테아노는 그녀가 객기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그대로 눕혀 치마를 들친다면 꼼짝없이 울며 제게 매달릴 것이다.
객기를 부려봐야 결과는 뻔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그럴 것이라는 걸 아는데, 라비엘리가 남긴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을 때였다.
“……아가씨!”
멀리 로제의 음성이 들려왔다.
‘젠장.’
테아노는 건물을 한 번 힐긋거린 뒤,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기세에 눌리지 않았더라면 한 번 정도 제대로 끌어안을 시간은 되었는데.
테아노는 신경질적인 발길질을 하며 덤불을 걷어내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자리를 비운 뒤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라비엘리는 그대로 서서 호흡을 골랐다.
‘……잘했어. 잘한 거야.’
라비엘리는 눈을 감았다. 자박자박 마른 풀을 밟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더는 저 발아래 짓밟히고 싶지 않아- 라비엘리는 땀이 밴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괜찮아, 잘했어.’
라비엘리는 여전히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급히 뛰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뺨은 여전히 욱신거렸고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따금 저를 부르는 로제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이대로 나간다면 겁을 집어먹은 표정을 들키게 될 것만 같았다.
테아노의 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졌을 즈음,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치마를 걷어들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렇게나 끌려 들어온 탓에 치맛단 여기저기가 가구에 걸려 찢어져 있었다.
‘어쩌지.’
지금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여관 어딘가에 있을 사제들에게도, 로제에게도 그리고 루시안에게도.
루시안이 묘하게 의지가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테아노와의 일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라비엘리는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아무도 몰랐으면 싶은데, 티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비엘리.”
여관 모퉁이를 돌자 정문 앞에 루시안이 서 있었다.
그를 마주한 순간, 라비엘리는 공연히 감정적으로 굴까 봐 표정을 정돈했다.
“준비는 다 했나요?”
상황에 어울리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루시안이 잔뜩 굳은 미간으로 걸어왔다.
“당신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