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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85)화 (85/136)

85화

닫힌 방문 사이로 마지막 음성이 흘러나왔을 때, 마우드는 뒤꿈치를 들고 서둘러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사실 처음에는 들켜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작이 제대로 된 대답 한 번 못하는 꼴을 보니 불쑥 겁이 났다.

사내는 곱상한 얼굴을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사람을 몰아세우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가만, 그럼 저 남자가 후작님의 아들이라는 거야?’

외형만으로는 두 사람 사이를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는데.

게다가 테아노가 중년이긴 해도 저렇게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들 앞에서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꼼짝 못 하는 것 역시 이상했다.

‘평범한 부자 관계는 아니라 이거지.’

팔자를 펴려면 젊은 쪽에 붙는 게 나을 것 같았는데 루시안은 제 알몸을 마주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마치 없는 사람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아가씨는 귀족 같던데. 왜 여기서 그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거지?’

쓸데없는 호기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우드는 조금 전 들은 이야기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궁금했고 말하고 싶었다. 꽤 재미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어쩌면-

‘또 모르지, 잘 이용하면 마이어가의 안주인으로 들어앉을 수 있는 발판이 될지도 모르잖아.’

맙소사, 마이어가의 안주인이라니!

마우드는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었는지 속으로 깔깔 웃었다.

‘아니지, 아니야. 왜 안 되겠어.’

후작은 이 복잡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것 같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가정사, 비밀을 알고 있는 신관, 아버지를 협박하는 아들과 정체불명의 여인이라-

‘나도 끼어들고 싶네. 안주인까지는 아니어도…… 극장 수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려나?’

그렇게 생각하자 제 손에 들린 편지 내용이 몹시 궁금해졌다.

‘사제님께 가져다드리라고 했지.’

마우드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봉투를 열어젖혔다.

그녀의 손놀림에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메이든.

자네가 있어 마이어가의 상황은 크게 걱정하지 않지만, 염려스러운 것이 하나 있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루시안이 몰염치한 짓을 하진 않았는지, 혹 라비엘리에게 허튼수작을 부리진 않았는지 걱정이 되네.

알다시피 라비엘리는 마이어가의 혈통을 이을 귀한 여인인 데다 산파로부터 특별한 처방을 받은 상태네.

그녀가 잘 지내는지 걱정되는군.

메이지에게 라비엘리의 안부를 물었는데 아직 답이 없으니 이걸 보는 즉시 오스트린으로 회신하라 전하게.’

편지를 읽은 마우드는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뭐야?’

지금 위에서 목격한 장면으로는 전혀 추론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후견인이라면서. 르휜의 후견인이라면서 속으로는 부인으로 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와중에 아가씨는 테아노의 아들과 함께 있고, 두 사람의 사이를 후작이 의심하고 있다.

‘음흉한 사람 같으니. 저택에 없는 걸 알면서 시험하고 있어.’

마우드는 그 부분에서 기가 막혔는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마 메이든이라는 자는 마이어가의 집사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집사라면 꽤 오래 신뢰를 쌓은 관계일 텐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시험하고 떠보는 행동을 하다니.

전날 밤에도 느꼈지만 테아노가 썩 신사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쪽에서 이미 저택을 벗어났고, 언제쯤 나갔는지를 얘기하길 기다리는 모양이네. 어떻게 할까. 이대로 사제님께 전달할까, 아니면.’

마우드는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리다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후작님, 나는 늘 약자의 편이라서.”

그녀는 서랍을 뒤적여 작고 볼품없는 펜촉과 말라붙은 잉크병 하나를 꺼내었다.

뚜껑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것을 털어내고, 손끝으로 펜촉을 여러 번 문지르고 나자 몇 글자 정도는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내용을 혼자만 알고 있기엔 아깝네. 에몬은 알고 있을까?’

마우드는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싱긋 웃었다.

* * *

라비엘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 사제들은 마구간에서 말을 끌고 있었다.

조심스레 인사를 나누고 이제는 떠나야 할 여관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처음 여기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될 줄은 몰랐다. 더하여 이곳에서 일하던 하녀와 함께 나오게 될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의 일이라는 건 한 치 앞도 알 수 없구나.

미래를 그리는 일도, 계획을 세우는 것도 어쩌면 전부 부질없는 짓일지 몰라.

그녀는 길었던 시간을 반추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데 익숙한 얼굴들 속에서 클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나오지 않으신 걸까?’

라비엘리가 고개를 빼 들고 연신 두리번거리자 안장을 점검하던 사제 한 명이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르휜 양,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려다 말고 어색하게 웃었다.

“저, 클라인 신관님께서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나요?”

“아.”

사제는 손을 두어 번 털더니 대답했다.

“신관님께서는 아침 일찍 사원으로 가셨어요.”

“사원이요?”

“네, 분위기도 살피고 그쪽에 전달해야 할 대신관님의 말씀도 있으셔서.”

“아.”

라비엘리는 고개를 돌려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를 바라보았다.

덤불과 보리수 울타리로 둘러싸인 아담한 규모의 사원이 떠올랐다.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분주해 보이던 사람들, 방어적으로 굴던 사제들의 모습까지.

“땅이 마르고 작물이 죽어간다는 보고가 올라왔거든요. 악마들의 짓이 분명했고요. 사원에서 정화하려 했지만 역부족이라 신전에서 움직였습니다.”

“그러셨군요.”

만약 클라인과 사제들이 때맞춰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루시안은 마검에 찔린 채 죽었을지 모르고, 가여운 바이젤 역시 악마에게 희생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양팔에 한기가 느껴졌다.

‘전부 지난 다음에 생각하니 끔찍하네.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라비엘리가 팔을 어루만지며 다시 여관 쪽으로 몸을 돌리자 마침 진료 가방을 들고 테아노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흠.”

테아노는 라비엘리를 마주하고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매를 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르휜 양.”

“네.”

“오스트린으로 가신다고 하셨지요?”

테아노는 라비엘리에게 손을 내밀며 온화하게 말을 걸었다.

그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함께 간다고 생각하자.

그곳에서 불감증은 얼마나 나아졌는지, 이제는 괜찮은지 확인하면 될 일이 아닌가.

물론 루시안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하나 두 사람이 계속 붙어 있지는 않을 테니 그리 신경 쓸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아뇨, 저는 오늘 출발하지 않습니다.”

라비엘리의 대답에 테아노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오늘 출발하지 않는다니요.”

“그게…….”

라비엘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엔 알게 될 테지만 테아노에게 지금 잃어버린 동생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더하여 당신과는 조금도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말도 차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말할지 미리 생각해둘 걸, 라비엘리가 가여운 자책을 하느라 말을 잊지 못하자 테아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오스트린에는 왜 가시는 겁니까?”

“초대를 받았어요.”

라비엘리는 단정하고 신사적인 미소를 지닌 클라인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초대?”

“네, 그리고 부모님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의 말에 테아노가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좋은 생각이시군요. 그럼 같이 가시지요.”

“아뇨, 신관님을 뵙고 출발하려고 해요.”

그즈음, 정비를 마친 사제들이 짐을 가지러 다시 여관으로 들어갔다.

앞마당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테아노가 라비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차피 오스트린에서 만나게 될 게 아닙니까.”

라비엘리는 뒷걸음질 치며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후작은 여기서 내게 함부로 할 수 없어.

“하지만 그분께 먼저 꼭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그분? 말씀?”

테아노는 라비엘리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식으로 굴면 곤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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