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루시안의 등장에 테아노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두어 번 헛기침하더니 등 뒤에 있는 마우드를 돌아보았다.
마우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조금 전 여인이 들어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제 이불로 적당히 몸을 둘둘 말든 아니든, 문밖으로 걸어나가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저 미남은 누구야?’
순식간에 잠이 달아날 만큼, 그야말로 완벽한 미남이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이불을 슬그머니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알몸으로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와 테아노의 등 뒤에 섰다.
하지만 루시안은 마우드 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우리 후작님 바쁘시네, 아침부터 잠시도 쉴 틈을 안 주는군요.”
마우드는 나른한 목소리를 내며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보는 것만으로 보들보들한 촉감이 느껴지는 머리카락, 붉은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 마우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루시안의 머리카락을 건드릴 뻔하였다.
‘이 아가씨의 애인인가?’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저 세 사람, 대체 무슨 관계지?
마우드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다시 이불을 끌어당겼을 때였다.
갈빛 머리 미남이 테아노를 향해 말했다.
“간밤에 애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후작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루시안과는 그리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지 테아노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안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후작님, 오늘 르휜 양과 함께 오스트린으로 갈 생각입니다.”
테아노는 당황한 탓에 되묻는 것도 잊었다. 그사이 루시안이 보기 좋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루미온 님의 신전에 가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신전에 가야 할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신관님께 여쭈시면 아마 자세히 말씀해주실 겁니다.”
루시안은 테아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았다.
그는 부러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클라인을 끌어들여 테아노의 말문을 막았다.
“…….”
“참, 르휜 양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시죠?”
테아노는 루시안이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할까 봐 불안했다.
여기서 아버지라고 부르기라도 한다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은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우선 상관없는 사람을 내보내는 게 급했다.
“마우드?”
테아노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침대 근처에서 미적거리는 마우드를 불렀다.
빨간 머리 아가씨는 다소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이불을 꽉꽉 움켜쥐었다.
“가요, 간다고요.”
그러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라비엘리를 한 번 쳐다보았다.
“아가씨, 하녀가 한 명만 필요한가요?”
“네?”
“일은 나도 잘하거든요. 아가씨가 외로울 때 노래도 불러줄 수 있는데.”
마우드는 싱긋 웃으며 라비엘리에게 말을 걸었지만, 두 눈은 사실 루시안에게로 향해 있었다.
“아뇨. 미안하지만 하녀는 한 명만 필요해요.”
“저런, 아쉽게 됐네.”
그 말을 끝으로 마우드는 느릿하게 문가로 나아갔다. 하지만 귀는 이곳에 남겨두고 싶었다. 놓치면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은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란 예감 때문이었다.
그때, 테아노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네.”
“이걸 사제님께 가져다드려.”
테아노는 종이봉투를 마우드에게 내밀었다.
명목은 심부름처럼 보였으나 사실 그녀를 이곳에서 멀어지게 할 목적이었다.
“이게 뭔데요?”
마우드가 되물었지만, 테아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마우드가 손에 든 것을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럴게요. 보수는?”
“…….”
“농담이었어요. 우리 사이에 보수는 무슨.”
“그만하고 어서 나가.”
그녀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문가에 기대 대화를 엿들으려던 생각을 어쩐지 들켜버린 것 같아서였다.
-쾅.
빨간 머리 여자가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하자 루시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아가씨네.”
그러더니 슬쩍 고개를 돌려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를 확인했다.
“제 어머니는 아니죠?”
“무, 뭐라고?”
테아노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내고 난 뒤에야 제가 너무 크게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농담이에요. 뭘 그렇게 놀라세요.”
그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망부석처럼 서 있던 라비엘리는 이 대목에선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제가 당할 때는 몰랐는데, 다른 이가 루시안에게 꼼짝 못 하는 걸 보고 있자니 꽤 즐거웠기 때문이다.
“참 후작님, 르휜 양이 왜 여기 있는지도 신관님께서 알려주실 겁니다. 그분께서 르휜 양을 오스트린으로 직접 초대하셨거든요.”
“초대? 초대라니.”
테아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비틀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르휜 양에 관해 꽤 많은 걸 알고 계시더군요. 자카린타스 성의 귀한 딸이었다는 것과 그녀가 롭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도 말입니다.”
“…….”
테아노는 회갈색 머리에 단정한 얼굴을 한 신관을 떠올렸다.
그는 높은 신성력과 훌륭한 가문으로 신전 내에서도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다.
루시안은 테아노의 표정을 살피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르휜 양의 후견인이 후작님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지요. 신관님께서는 그 사실을 몹시 다행이라 생각하셨답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시죠?”
사내의 말은 얼핏 평화롭게 들렸으나 테아노에게는 마치 표창처럼 날카롭게 날아와 박혔다.
“게다가 그 훌륭한 분은.”
루시안은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테아노는 그의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루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가문에도 꽤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
“그러니 잘 생각해보세요.”
코앞까지 다가온 루시안이 테아노의 귓전에 대고 그에게만 들릴법하게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아버지.”
“…….”
“당신의 보살핌을 받는 여인이 하녀 한 명 없이 그 먼 곳까지 간다면, 모두가 후작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테아노는 루시안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짐과는 반대로 양쪽 볼은 경련이 일듯 씰룩이고 있었다.
“당신이 르휜 양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멋대로 판단하겠지.”
“…….”
“그런 오해와 소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위대한 석학께 어울리지 않지요. 안 그렇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루시안은 다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테아노는 잔뜩 당황했는지 양쪽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젠장!’
사실 하녀 한 명 데려가는 일이야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하녀를 부리는 데 주는 돈이야 뻔했으니까.
마음에 걸리는 건 데려가려는 여인이 에몬의 여관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다만 제 허락 없이 루시안과 저택을 벗어난 사실이 불쾌했고, 때문에 라비엘리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몬의 여관에서 일하는 하녀를 데려가는 건 도의적으로…….”
“에몬 씨께서 이미 새로운 하녀를 보냈습니다. 후작님도 아는 여인이던데요.”
“뭐? 내가 알다니. 그게 무슨.”
“조금 전 나간 빨간 머리 아가씨가 앞으로 이 여관을 관리할 겁니다.”
“…….”
“다행이지 뭡니까, 에몬과 좋은 관계는 계속 유지될 것이고 르휜 양은 수발 하녀를 동반해 오스트린으로 가고.”
“…….”
“엘던의 새로운 관리자와 후작님은 지금처럼 친분을 유지하시면 되겠지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으나 테아노는 말문이 막혀 커다란 눈동자만 굴렸다.
“그럼 허락의 뜻으로 알고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루시안은 우아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라비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비엘리는 잠시 망설였으나 후작에게 예를 갖추고는 루시안의 손 위에 살포시 제 손을 올렸다.
“르휜 양, 로제에게 준비를 서두르라고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