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는 얼먹은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랑 같이 가요.”
“아가씨.”
로제는 라비엘리가 저를 데려가기에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기품이 넘치는 몸가짐과 우아한 목소리는 분명 명문가의 영애처럼 느껴졌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리라.
“같이 가자니요. 저를 데려가신다는 말씀이세요?”
“네, 맞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라비엘리에 관해선 아는 게 없었다.
부군인 줄 알았던 루시안은 타인이라 했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하질 않나, 몰리 이아신스 부인도 아니었다.
몰락한 가문의 여인인 걸까.
그렇다면 루시안과는 무슨 사이인 걸까.
함께 가자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지만, 섣불리 좋아할 수도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어 로제는 애먼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짐작하고 있듯이 내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아요. 그래도 여기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아가씨.”
잠시 입술을 모아 붙인 라비엘리가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고향은 롭이에요.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았어요.”
“들어본 적 있어요. 가본 적은 없지만요.”
“지금은 로튼에 있어요.”
그저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했을 때는 못 견디게 괴로웠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자 생각보다 담담히 말할 수 있었다.
“롭에서 살 때,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되어 가족을 잃었어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때 로튼의 후작께서 제 후견인이 되어 주셨어요.”
“아, 세상에. 정말 감사한 분이시네요.”
라비엘리는 구역감이 치미는 것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후작이 어떤 사람인지 밝혀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간밤에 여기 오셨던 테아노 마이어 후작님이 제 후견인이세요.”
“네? 뭐라고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어디로 팔려 갔을지, 어떻게 살았을지 알 수 없죠.”
“세상에, 아가씨.”
로제는 이번에야말로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반응이 라비엘리에게 되레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이야기를 들을 때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라비엘리는 연한 갈색 머리의 사내를 떠올리며 입술을 열었다.
어차피 로제와 함께하기로 했으니 알아야 할 부분이었다.
“마이어 후작님의 아들이에요.”
“……아들이라고요?”
로제는 조금 전의 다짐이 무색하게 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사람과 함께 나와야 할 이유가 있었어요.”
라비엘리는 제 상황을 설명하다 보니 어쩐지 변명만 늘어놓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여기까지가 제 상황이에요.”
라비엘리는 공연히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당신과 함께 가느니 차라리 떠도는 게 낫겠다고 말하면 어쩌나,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자책하던 찰나였다.
“잘하셨어요, 아가씨. 저는 아가씨가 정말 좋은 분이라는 걸 알아요.”
“로제.”
“지금까지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귀한 분께서 이렇게 힘들게…….”
“그래도 로제를 알게 되어 감사해요. 그러니 앞으로도 나와 함께해주겠어요?”
“제가 감히 그래도 될까요?”
“지금 후작님께 말씀드리려고요.”
라비엘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얼굴이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함께해주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거예요.”
* * *
테아노는 아침 일찍 신전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들고 온 짐은 많지 않았지만 준비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던 도구와 약초를 전부 꺼내 제대로 정리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메스와 가위를 소독하고 거즈를 제대로 둘둘 말았다.
그러고는 표본과 탐침, 뼈로 만든 톱, 학부 시절부터 간직해온 비밀스러운 고약 등을 꼼꼼하게 챙겨 넣었다.
마지막으로 겨우 엄지손가락만큼 남은 티티에 잎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젠장.”
분위기에 취해 비싼 약을 너무 많이 낭비하고 말았다.
하지만 도저히 먹지 않고는, 그녀에게 먹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테아노는 어젯밤 처음으로 붉은 머리 여자가 얼마나 위험하고 아름다운지를 깨달았다.
갈매기 모양의 눈썹을 한 여자가 얼마나 교태로운지, 하늘로 뾰족하게 솟은 코가 얼마나 뜨거운 호흡을 내뱉는지도 말이다.
‘이렇게 향이 좋은 건 처음이에요, 후작님. 온몸이 나른한 것이 정말 최고야.’
‘그래? 그 정도로 좋아?’
‘네, 조금 더 먹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얼마든지. 얼마든지 먹어도 좋아.’
‘세상에 좋아라! 천국에 온 것 같아요.’
‘정말?’
‘네, 정말이요. 여긴 천국…… 당신은 그럼 신인가요?’
‘그럼 너는 천사인가?’
‘이렇게 야한 천사가 있을까요?’
‘지상에 있었군. 여기 말이야.’
목소리를 팔아 먹고산다는 그녀는 얼마 뒤에 있을 오페라를 보러 오라고 했다.
오페라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 마우드를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반드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쁠 것 없지. 그리고 주제를 잘 아는 여자 같았으니까.”
간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다시 발끝부터 욕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남은 티티에를 조금 먹을까 싶었지만, 테아노는 고개를 흔들며 참아냈다. 갈 길이 멀었다.
“후우, 하룻밤 대가로 과한 것 같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마지막으로 테아노는 마이어가로 보낼 편지 봉투를 손에 쥐고는 문을 열었다.
복도에 선 테아노는 잠시 멈칫하고선 위를 올려다보았다.
딱히 확인하지 않았지만 루시안은 간밤에 의식을 찾았을 것이다.
그가 붕대로 감아놓은 팔은 조금씩 나아지겠지만 완전히 회복하는 데는 며칠이 더 걸릴 거로 생각했다.
‘라비엘리는 어디 있지? 설마 아직도 3층에 있나?’
그녀를 떠올리자 움직임이 다소 느려졌을 때였다.
똑똑.
아침을 가져온 하녀일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알몸으로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마우드를 한 번 힐긋거렸다.
신전으로 돌아가면 어쩔 수 없이 강제 금욕을 해야 한다.
아침을 먹고 나면 한 번 더 끌어안은 뒤 내려보낼 생각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인지 마우드가 한 번 뒤척였을 때, 안으로 라비엘리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일부러 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조금 열어 두었다. 그런 뒤 테아노가 닫지 못하도록 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섰다.
“라…….”
테아노는 라비엘리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등 뒤에는 마우드의 귀가 있다. 그녀는 그리 중요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관에는 사제들과 신관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러모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르휜 양.”
테아노가 예의를 갖춘 목소리를 내었다.
라비엘리는 테아노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등 뒤에 비친 여인의 실루엣 역시 확인했다.
구불구불한 붉고도 아름다운 머리카락- 라비엘리는 테아노의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여인을 외면한 채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네, 르휜 양.”
말소리 때문인지 등 뒤의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계신 것 같으니 조금 뒤에 올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테아노의 음성에 마우드는 완전히 잠이 깨서는 부스스 일어났다.
그녀는 라비엘리를 보고 이불을 추어올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라비엘리는 마우드를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들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이곳이 낯선 곳이라 다행이고 또 다행이었다.
그에게 간밤에 편히 잤는지, 먼 길을 오시느라 고단하시지 않는지 따위의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도 다행이었다.
바로 용건을 꺼낼 수 있으니 말이다.
“부탁이라니요. 제게요?”
테아노가 열린 문틈을 한 번 힐긋거렸을 때였다.
“저택에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테아노는 라비엘리의 말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데려가다니. 누구를 말입니까?”
“어제까지 엘던에서 일하던 하녀예요. 3년 동안 이곳을 관리해왔어요.”
“하녀?”
“네. 여기 있는 동안 지켜봤는데 일도 잘하고 손도 야무져요. 저택에 돌아갈 때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으음.”
테아노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라비엘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젯밤부터 그녀의 고고한 자태와 목소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한술 더 떠 하녀를 데리고 가겠다니.
“저택에는 이미 르휜 양의 충실한 하녀들이 있는걸요.”
테아노는 라비엘리가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덧붙였다.
“그리고 여긴 나와 오래 거래를 해 온 사람의 여관이에요. 여기서 일하는 하녀를 함부로 데려가기에는 조금.”
“하지만 이미 에몬 씨께서.”
라비엘리가 한마디 더 하려 했으나 테아노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아뇨, 르휜 양.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그러고는 예의 우아를 가장한 미소를 보였을 때였다.
라비엘리가 열어 둔 문이 완전히 뒤로 젖혀지더니-
아침 공기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루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