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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82)화 (82/136)

82화

꿈속에 묻혀 있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라비엘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아슴아슴한 아침 공기를 느꼈다.

“으음.”

가장 먼저 깨어난 건 촉감이었다. 그녀는 손에 닿은 이불을 가볍게 움켜잡았다가 놓았다.

만지는 대로 눌렸다가 느릿하게 돌아오는 것을 느낀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

잘 말린 풀의 농농한 내음 같기도, 햇살에서 스며든 냄새 같기도, 혹은 나무에서 갓 딴 열매의 싱싱한 향기 같기도 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이불을 쥐었다가 놓으면 오래도록 각인하고 싶을 만큼 고귀한 향이 물씬 풍겼다.

“……어?”

주변만 느릿하게 떠돌던 정신이 돌아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인제 그만 자요.’

익숙하고 편안한 누군가의 음성.

한쪽 몸이 기울어지는 것도 모르고,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눈을 감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꺼져가던 간밤의 기억. 생각나는 것이라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수마에게 두 손을 들어버린 제 모습뿐이다.

‘잘 자요.’

라비엘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제가 간밤에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루시안의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퉁겨지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마지막 기억과는 다르게 침대 위에는 그녀뿐, 루시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쳤나 봐.”

분명 태연한 얼굴을 하고 문을 연 것까지는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러다 아래로 내려갈 여력이 없어 잠시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돌연 루시안이 밖으로 나와 저를 안았던 게 떠올랐다.

“어떡해.”

라비엘리는 순식간에 차오른 열감을 빼내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는 바람에 간밤의 기억은 더욱 진해질 뿐이었다.

“어디 간 거지.”

루시안이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어도 문제였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그거대로 큰일이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아픈 사람 침대를 뺏은 것도 모자라 쫓아냈다니 정말 잘하는 짓이구나, 라비엘리.

라비엘리가 얼굴을 거칠게 매만지며 침대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나요? 아침을 가져왔어요.”

“……아, 네. 들어와요.”

라비엘리가 대답하자 곧 나무 쟁반을 받쳐 들고 로제가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른 얼굴이었다.

라비엘리만 보면 말을 더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는데, 어쩐지 다문 입술과 침착한 눈매가 영 낯설었다.

“좀 괜찮으신가요?”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로제가 라비엘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 로제는요?”

“저도요.”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한 라비엘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로제가 가볍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고단하실 텐데 좀 더 쉬세요.”

“아 참, 로제.”

“네.”

“혹시 2층에…….”

말끝을 흐렸지만, 로제는 그녀의 뒷말을 알아들었다.

“신사분께서는 2층에 계세요. 조금 전에 아침을 챙겨드렸고요.”

“그렇군요. 고마워요.”

아무래도 제가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탓에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 같았다.

그사이 로제는 손을 모으고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더 물어볼 것이나 시킬 일이 없다면 내려가겠다는 표정이었다.

평소였다면 왜 루시안이 2층에 있고 라비엘리가 3층에 남아 있는지를 묻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을 텐데.

로제가 돌아서려는 순간, 라비엘리는 지금 제가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로제.”

“네.”

“……미안해요.”

라비엘리는 로제에게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 엘던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여기 이렇게 오래 머무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에몬의 여관이라는 사실이 두려웠고 루시안과 함께 있다는 걸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으니까.

라비엘리의 사과에 로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누군가 제 행적을 알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어떻게든 다른 이름 속에 숨고 싶었어요.”

“아가씨…….”

“내가 이상하게 보이고 못 믿을 사람처럼 느껴지겠지만,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건 사실이에요. 이곳에 있는 동안 로제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아서…… 그리고 덕분에 무척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오, 세상에. 아가씨.”

로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라비엘리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몸을 낮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가씨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 출신이신지,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닌걸요. 아가씨께서 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신 것처럼요.”

“…….”

“저를 잡일이나 하는 하녀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대해주셨어요. 그걸로 이미 충분한데 사과를 하시다니. 당치도 않으세요.”

“로제.”

로제는 라비엘리의 손을 가만히 붙들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아가씨께서 이야기하셨을 때 조금 놀라긴 했어요.”

“미안해요.”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아가씨께 내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

“하지만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겨우 방을 청소하고 식사나 챙겨드리는 일밖에는.”

로제는 하려던 말을 안으로 삼켜냈다.

돌연 루시안과는 그럼 정말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졌으나 제가 물을 내용은 아니었다.

주제넘은 질문을 참아내길 잘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내 이야기가 궁금한가요?”

라비엘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

“누구에게 해본 적도, 그리고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이미 지난 일이었다.

하지만 과거가 현재를 만들듯, 지나온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지금의 제 모습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벼이 들출 수도 단편적인 것만 털어놓을 수도 없다.

모자이크처럼 어지러이 흩어진 기억. 단순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라비엘리의 눈가가 발갛게 젖어 들었다.

“아가씨, 아녜요.”

“…….”

“힘든 기억 떠올리지 마세요. 저는 그냥 지금 이렇게 아가씨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좋은걸요. 그리고 보잘것없는 저를 좋아해 주신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로제.”

마주 앉은 여인과 비슷한 얼굴이 된 로제가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닦아내더니 말했다.

“여기 더 남아 아가씨를 돕고 싶은데 오늘은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라비엘리는 그제야 로제의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를 알았다.

“오늘은 사장님이 오실 테고 여기 계속 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거든요.”

“로제, 어디로…… 가려고요?”

생각해보니 이 문제를 이야기하던 중 일이 벌어졌다.

결말을 내기도 전에 에몬이 보낸 새로운 관리자가 왔고, 악마를 봉인하고 다친 루시안을 치료하는 등 일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로제의 일도 마무리가 되어야 했다.

“제가 갈 곳 하나 없겠어요? 염려 마세요. 엘던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니 어디서든 먹고 살 수 있어요. 이래 봬도 경력자라고요.”

로제가 씩씩하게 웃으며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로제.”

도저히 그녀의 미소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로제가 그랬듯이.

“네, 아가씨.”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과거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무수한 날들이 여전히 암담하지만.

라비엘리는 손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나랑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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